에블린 데일의 꿈이 깨어진 것은 어느 가을날이었다. 사랑을 맹세한 약혼자가 공작위를 물려받던 날. ‘쉽게 말씀드려서 이것은, 혼전 계약서입니다.’ 제러드는 소설이 그녀의 목숨과 다름없다는 걸 알면서 공작 부인으로서의 품위를 위해 집필을 관둘 것을 요구한다. 그 밤. 에블린은 공작저에서 도망쳐 나와, 트리센 제국을 떠난다. 그로부터 3년이 흘렀다. 리튼 왕국에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며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에블린의 다짐은 유효했다. “레이너스 황후께서 데니스 하울 작가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 “에블린 데일 양. 당신을요.” 출판사 대표, 브라이언트 클립튼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 “출발하기 전에 시간을 내 주시죠. 우리가 서로를 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 테니까요.” 설마. 에블린이 미간을 조금 더 찡그렸다. “클립튼 씨가 저와 함께 가시나요?” “네.” “제국까지요?” “어디든지요.” 에블린은 말을 잃은 채 브라이언트의 얼굴만 마주보았다. 거절을 해야 하는데 마땅한 근거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와 동행할 수 없는 이유.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이유를 대야 해.’ 그러나 간절히 궁리해도 빠져나갈 틈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낭패였다.
1926년 여름.조선총독부 법무국장의 금지옥엽. 백작가의 사랑스러운 고명딸.하루하라 미나는 처음으로 경성 땅을 밟았다.아버지가 준비한 선물, 그녀의 근사한 남편감을 만나기 위해.“하야시 슌세입니다.”경성 대부호의 상속자. 매국 대신의 장손이자 자작가의 후계자.임준세.“그쪽은 이 결혼 왜 하고 싶어요?”“총독부에서 근무하고 싶습니다.”“……너무 솔직하시네.”그녀의 눈 속에서 그는 뚜렷하게 웃고 있었다.서글서글, 언죽번죽, 뻔뻔하게 잘도 웃는다.밸도 없는 사내 같으니.“그렇게 출세하고 싶어요?”“안 됩니까?”결단코 함께 필 수 없는 꽃이 있다.태생적으로 섞이지 못할 사람이 있다.그러니 미나 또한 이 철칙을 꼭 기억해야 한다.“오래 기다렸습니다. 하루하라 양.”순진하게도 그런 상대를 마음으로 대했다가는,정녕 걷잡을 수 없이 우스워지고 말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