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어두운 지하 셋방에서 홀로 숨죽인 채 살고 있던 지혜. 남은 것이라고는 갚을 길 없는 대출 이자뿐이던 그녀는 동창회에 참석하면 일당을 주겠다는 친구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한다. 그렇게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동창회 자리에 나간 그녀에게 기억도 나지 않는 고등학교 시절의 마지막 짝, 은석이 황당한 제안을 해 오는데…….“몇 개월 같이 살아 주고 대외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아내가 필요해.”잘나가는 기업가가 된 그의 제안을 지혜는 단칼에 거절하지만, 그녀와의 결혼을 통해 얻을 게 있는 은석은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다.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와수많은 비밀을 품은 채 좀처럼 그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 그녀.서로 원하는 바가 다른 두 사람은 결국 행복해질 수 있을까?▶잠깐 맛보기“내 방은?”“어? 어, 여기”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은 그녀의 물음에 당황해 은석은 잠시 주춤거렸다. 그녀의 방으로 안내된 지혜는 한동안 가방을 내려놓지 않은 채, 방 한가운데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난…… 한 번도 이런 방을 가져 본 적이 없었어. 알아? 오래전엔 내 나이쯤 되면 커피 광고에나 나오는 전망이 보이는 근사한 아파트 테라스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살게 될 줄 알았지.”은석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지혜의 넋두리는 슬펐다.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을 듯했던 그녀의 뒷모습은 슬퍼 보였고, 그간의 삶의 고달픔이 작은 가방에 내려앉아 그녀를 주저앉힐 듯 보였다.“지혜야.”“그렇게 부르지 마. 그렇게 다정하게 부르면, 언젠가는 너와 함께 고급 아파트 테라스에서 차를 나누는 사람이 나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하게 되잖아.”그제야 지혜는 작은 짐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은석과 마주 섰다.“이 집에서는 우린 부부가 아니라 친구 하자. 고등학교 동창. 이 집 밖을 나서면 네가 원하는 아내 해 줄게, 계약직 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