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청한 계집, 네 방에 처박혀있으란 말이야!”“오늘도 공작님과 도련님들에게 말대꾸하셨다고요. 그러지 마시죠. 그저 전처럼 지내십시오.”“두 번 다신 내 눈에 띄지 마, 패트리샤 헤라르일라.”소설 속 모두에게 미움받는 악녀로 빙의했다.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패악질을 부리다 끝내 비참하게 죽을 운명이라지?하지만 난 그렇게 죽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내가 싫다는 이들의 사랑, 나도 바라지 않아!분명 그랬는데···.“딸아, 더 원하는 건 없느냐? 뭐든 말만 하거라. 뭐든!”“제발. 제발 부탁할게.”무엇이든 해주고 싶어 하는 아버지와 눈물까지 흘리며 애원하는 오라버니.“패트리샤 공녀님 같은 천사를 모실 수 있다니, 정말 영광입니다.”내가 좋아 죽겠다는 사용인들.“그럼. 우리도 친구가 아닌가?”나와 친구가 되겠다는 남주까지.소설이 바뀌기 시작했다.
“어머니,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제가 다 할게요!” 제국에 죽음과 혼란을 가져와 끝내 세상을 무너뜨릴, 제라르트 마르틴헤즈. 훗날 괴물이 될 그의 어머니이자 제라르트의 유년 시절을 철저히 망쳐 놓은 악녀, 안디트네에 빙의했다. 이 작디작은 꼬맹이가 공작가를 결국 불지옥으로 만든다고? 답답한 마음에 텃밭을 가꾸던 내 손길이 무자비해졌는지 자그마한 얼굴이 시야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아앗, 어머니…… 땅은 다 다져졌는데요?” 짧은 다리로 온종일 졸졸 쫓아다니는 아이도 눈에 밟히고, “부인께서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혹 이곳을 떠나신다 하더라도 너무 늦지 않게 찾겠습니다.” 무뚝뚝하고 냉정하기만 한 남편인 줄 알았건만, 보면 볼수록 제라르트와 똑 닮은 공작도 마음에 걸리고……. 어쩔 수 없지. 이왕 이렇게 된 거 내가 다 잘 키우는 수밖에!
눈을 떠보니 좀비물에 빙의해 있었다.그것도 좀비에게 막 물리기 직전의 순간으로.“아니, 잠깐만!”내가 짜증 좀 내고 트롤 짓을 한 악녀는 맞는데그래도 버리고 가지 마!내 간절한 애원에도 주인공들의 뒷모습은 점점 멀어져 갔다.그리고 결국…콰득!빙의한 지 5분 만에 좀비에게 물려버렸다.* * *“어떻게 무사할 수 있는 거지, 페넬로페?”무사히 돌아온 내 모습에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할 때, 여주 릴리아가 달려와 나를 끌어안았다.“공녀님! 살아계셨군요!”다행이라는 듯 나를 끌어안은 여자의 달콤한 체향에 입이 자꾸만 벌어졌다.지금이라면 콱 물어버릴 수 있을 것 같은데…날 버리고 도망친 이들이었다.그러니 하나 정도는 물어도 괜찮잖아?코끝에서 살랑이는 달큰한 체향에 정신이 점점 혼미해졌으나 경계하듯 칼을 겨눈 대공에 정신을 꽉 붙든 채 본능을 억눌렀다.그래. 조금만 더 버티면 약이 개발될 텐데, 여기서 죽을 순 없었다.그렇게 주인공들 곁에서 본능을 억누르며 좀비라는 사실을 숨기는데…“전하, 전 괜찮아요.”“그럴 리가 없잖아. 이렇게 다쳐놓고.”괜찮으니까 괜찮다고 말해 봐도 나를 가만히 두질 않는다.“내가 할 테니, 그냥 있어.”“다음엔 제가 공녀님을 구할 거예요.”“제발 나한테 널 두고 가라 말하지 마. 네가 잘못될까 봐 미칠 것 같단 말이야.”주인공들이 뭔가 단단히 오해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