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이 종료되고 7년. 설희는 아이와 함께 귀국한다. 그리고, 운명처럼 마주친 전남편 주원. 설희가 오픈한 카페 건물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고 찾아온다. “이 건물 내가 매입해서 다시 지을 거야. 거기 도장 찍으면.” 십 년 전에 봤던 그 결혼 계약서였다. 어쩌면 이 남자는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진 게 없는지……. 때마침 유치원에서 돌아온 아이와 주원이 마주친다. “그러니까…… 저게 진짜 네 애라고……?” 그대로 물러설 줄 알았으나, “네 애잖아. 그럼 너만 엄마 하면 되잖아.” 그나마 남아 있던 미운 정까지 박박 긁어 알뜰하게 던져 버린다. “차주원 씨. 잘 들어요. 우리 계약은 이미 7년 전에 끝났어요. 그 끔찍한 계약서에 도장 찍는 일 두 번 다시 없어요. 그쪽은 지후 아빠로 자격 미달이에요.” 아빠는커녕 남편이 될 자격조차 없는 전남편을 길들이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세상에 말을 걸다> 환상과 현실의 세계 미로 속에서 길 잃은 우리를 위하여! 작가 이정은의 일곱 개의 매듭을 가진 소설집, 작가가 최근 발표한 중단편이 실린 『세상에 말을 걸다』가 2014년 5월 출간되었다. 소통의 욕구, 결국 자기 존재를 회복하려는 눈물겨운 노력이 담긴 생의 창조적 에너지. 『세상에 말을 걸다』는 이를 담고 있는 작품집이다. 수록된 작품 중 2011년 발표한「무인도」는 아시아황금사자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13년 발표한 「다마고치」는 2014년 한국소설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가장 먼저 수록된 단편 「다마고치」는 별을 모티프한 이야기로, 현실과 환상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작품이다. 메타픽션 작품 등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작가의 환상 속에서 나온 세계가 오히려 진짜 현실처럼 보여 더 진실한 세계를 표현해 주고 있다. 이번에 중편으로 확장해서 실은 아시아황금문학상 수상작 「무인도」는 한과 죄의식으로 자살 충동을 안고 무인도로 떠났다가 진정한 자아로 돌아오는 주인공을 통해 자신을 먼저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섬’은 단순한 공간적 배경이 아닌 작품의 맥을 이어가는 심리적 공간으로 작동하고 있음에 주목할 만하다 . 중편소설 「필드에 서다」는 슈퍼에고의 금기를 벗어던지고 스스로 슈퍼우먼으로 변신한 21세기의 자유로운 중년 여성들이 세상의 중심으로 날아오르는 과정을 세밀하게 이어나가고 있다. 사랑·희망·용기가 사라졌을 때 그녀들이 맞닥뜨린 것은 절망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출발이었다. 「알바트로스의 날개」는 ‘책’이라는 소재를 통해 욕망과 그 속박에서 해방되어 세상을 날고자 하는 주인공을 통해 희망을 상징하고 있고, 「여우비」는 표현의 적나라함과 솔직함이 매력인 작품으로 사람들의 허위와 위선을 드러내 보이면서 섬뜩하게 다가오는 새로운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종이옷 한 벌」은 최근 나타나는 ‘아버지의 전락’과, 주인공이 어린 시절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던 시선과 기억을 담고 있는 중편이다. 우리 현실에서 마주칠 수 있는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아버지의 모습과 작가의 자전적 성격이 짙게 배어 있는 작품이다. 「송짓골 가는 길」은 전쟁이라는 역사적 격변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바람꽃처럼 살다가 젊은 나이에 죽어간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등장인물들은 서로 근원적인 갈등을 일으키는데, 이는 인간 존재의 적나라한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어 인상적이다. 작가 이정은이 치열하게 써내려간 일곱 편의 작품들, 그 속 인물들의 삶의 행태를 좀처럼 짐작할 수가 없다. 그래서 작품의 결말 부분에 다다르면 끝을 알 수 없는 미로에 들어선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소설 속 인물들은 오히려 길을 잃음으로써 그들이 목적하는 길에 가까이 진입한다. 삶은 끊임없이 소통을 요구한다. 현실에서 가능할 법한 일을 생각해 내는 것이 상상이라 생각한다면 작가의 세계로 빠져보라. 새로운 감동과 전율을 고대하는 독자들에게 떳떳이 이 책을 추천한다.
<블루 인 러브> 상처를 넘어서 새로운 여정으로 소설가에게 중요한 것은 그 소재를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것이다. 『블루 인 러브』는 인간 내면의 상처와 사랑을 주제로 한 소설로, 경기도 문학상을 수상한 이정은 작가의 네 번째 장편소설이다. 상처 없는 삶은 없다. 삶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입힌다. 그러나 자신에게 스스로 상처를 주지 않으면 상처가 우리에게 해를 입힐 수 없다. 이는 각자 상처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달렸다. 상처에 대해 집착할 때 부풀려지고, 그 무게에 눌려 그로 인해 삶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작가의 인생에 대한, 그리고 열정과 사랑이 묻어나는, 약자들 시선에서 그들의 고통을 구체적으로 형상화시킨 작품이다. 그의 작품에서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다. 이 작품 역시 그 바탕에 고통에 대한 연민과 따스함이 흐른다. 이정은의 『블루 인 러브』는 독자의 손에 거울을 들려주었다. 저마다의 불운, 저마다의 사랑, 저마다의 미래를 비쳐보았을 것이다. 거의 사실에 가까운 심리묘사와 행위를 담아낸 이 소설에서 습득해야 할 점과 버릴 것을 가려내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작가는 주장하지 않고 다만 제시했을 뿐이다. 약자의 시선으로, 성폭력으로 인한 상처와 만남과 구원 그리고 희망을 함께 다루려는 이 소설은, ‘시대의 해석’이란 타임머신을 타고 우리를 다시 신천지로 데려다 준다.
“네 눈엔, 내가 정말 멀쩡해 보여?” 그의 말에 놀란 은서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다, 다 나은 거 아니에요? 아직도 아파요? 어떡해……. 어디, 어디요? 얼마나요?” 답답한 마음에 은서가 그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렇게 날 보고 얘기해야지.” “……네?” 은서가 멍한 얼굴을 하고 연신 눈만 깜빡거렸다. “제대로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내가 멀쩡한지, 아닌지.” “대체 지금 무슨 말…….” 본하가 천천히 걸음을 떼며 지긋한 눈으로 은서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너무 벅차서 은서가 도망치듯 눈꺼풀을 내렸을 때였다. “널 찾아오려고 해.”
꿈같은 사랑을 속삭이던 남자가 사라졌다. 그리고 5년 후, 고용주와 사용인으로 다시 만났다.“혹시 우리 어디서 만난 적이 있습니까?”분명 저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는데.그러던 어느 날, 그가 5년 전 그 모습으로 다가왔다.“혜원아, 나랑 놀자.”기억이 돌아온 줄 알았으나 다시 아침이면 고용주로 돌아오는 그.그리고 다시 밤이 되면, “왤까? 너만 보면 미칠 것 같은 이유가.”“도훈 씨, 제발….”“더 애원해 봐.”견디지 못한 그녀는 도망치고 만다. “날 떠나지 않겠다고 해 놓고서 감히 도망을 쳐?”“그렇다고 사람을 붙잡아다 가둬요? 지금 하는 짓이 뭔지 몰라요? 납치고, 감금이야!”“한 달 뒤 강혜원 씨와 나는 결혼하게 될 겁니다.”“…뭐라고요?”“그러니까 이건 혼전 동거라고 해 두지.”
가족들을 죽인 원수의 아들 연태욱. 12년 전 그날 유일하게 살아남은 여자 선유리. 유리는 자신의 가족을 몰살시킨 남자의 아들 연태욱의 비서로 들어간다. 그리고 3년 후, “저는 이번 달까지만 일하겠습니다.” “곤란한데. 마음 바꿀 여지없겠습니까?” “없습니다.” “내가 선유리 씨를 좋아해서 사표는 수리 못 하겠습니다.” 변수가 있었다. 그의 난데없는 고백이 유리의 차가운 마음을 뒤흔들었다. “다섯 번만 만납시다. 결혼을 전제로.” “다섯 번 자자는 뜻인가요?” “나랑 자면 나를 책임져야 할 겁니다. 처음이니까.” 매력적으로 웃는 그의 얼굴. 유리의 앞으로 운명의 수레바퀴가 굴러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