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오사카에 내리던 봄비> 에피루스 베스트 로맨스소설! "안 됐지만 난 자네와 혼인을 해야겠네." 보송보송 솜털도 가시지 않은 장다리꽃 여진 애기씨. 이 애기씨 뭘 자셨기에 이리도 장하게 크시고 강건하신가. 저는 양반이오, 나는 상인이라 법도가 그렇지 아니한데, 정신대 끌려갈 위기의 애기씨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혼인하자 하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애기씨는 애기씨인데 어찌하여 애기씨는 낯선 오사카에서 이리도 잘 사시는가. 강제 혼인이나 애기씨는 내 부인이오, 내 의무인데, 저 미싱 돌리는 것 좀 보소. 벌건 대낮에 장딴지 내놓고 사뿐사뿐 걸어가는 우리 애기씨. 빼앗긴 조국은 애처롭고, 받아줄 수 없는 사랑은 서글프니 애기씨, 나의 여진 애기씨, 이 오사카에 내리는 봄비는 내 사랑이라오.
<꽃잠> 〈강추!〉대체, 너는 무엇으로 빚어놓은 것일까, 필경 사람의 몸으로 빚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주 매혹적이고 위험한 양귀비 꽃잎과 그 하얀 꽃가루를 섞어 빚어놓은 것일 거다. 아니고는, 아니면 어찌 이렇듯 깊고도 매혹적으로 나를 빨아들일 수 있다는 말이냐. 무엇이란 말이냐, 이 기분. 너를 감싸고도는 이 향기에 숨 막혀 죽을 것 같구나. 네 향기가 강해 심장이 멎는 것 같아. --격구의 대가, 약관의 나이에 투전계의 전설이 되어버린 투전계의 국수(國手), 조선 최고의 검객, 조선 최고의 한량, 조선의 이백, 황보준휘(皇甫俊暉) 도련님은 오늘 제 앞에 나타나지 않으셨어야 했습니다. 그리하였더라면…… 저는 그냥 스쳐 갔을 것입니다. 도련님, 여왕벌 같으시던 당신의 어머니와 그리고 저 인옥에게는 목숨 같으신 당신…… 이제 당신을 유혹하고 그리고 내가 당신을 잡겠습니다. 그래서 죽음처럼 잔인하게 은애하고, 죽는 것보다 더 무섭도록 처절하게 부숴주겠습니다. -문향각(文香閣)의 명기 붉은 꽃 일타홍(一朶紅), 나는 살아남기 위해 기방으로 갔다. 그리고 조선(朝鮮) 땅에서 여아로 태어난 내가 가슴속에 응어리진 한을 풀어낼 방법이 달리 생각나지 않아 기생이 되었다. 이혜경의 로맨스 장편 소설 『꽃잠』 제 1권.
<미궁> 〈강추!〉“슈카, 기억나니, 넌 언제나 내가 적어준 하이쿠들을 보며 눈물짓곤 했지. 하지만 이젠 그 하이쿠들을 읽지 말아야 해. 절대로 울지도 마. 미련도 두지 마! 넌 그럴 수 있니, 그럴 수 있어? 아니, 아니야! 넌 그 모든 일들을 잊을 수 없어. 그럴 수 없어!” “아니, 난 할 수 있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내 부모를 죽인 원수를 아비로 알고 살아왔어. 그 모든 것을 알고도 모른척한 당신을 세상에서 가장 좋은 오라비로 알고 살아왔어. 그런 나야! 그런 내가 왜 못해? 용서하지 않을 거야! 다 죽일 거야! 다 태워 버릴 거야! 살아있는 걸 후회하도록 고통스럽게 만들어 줄 거야! 꼭, 그렇게 할 거야!” 얼음처럼 차갑고, 새파란 칼날처럼 날카로운 사랑―슈카(失香) “그래, 솔직히 말하지. 너 때문에 나는 천천히 미쳐가고 있다. 너를 사랑한다…… 그 많은 날들 난 언제나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것조차 허락받을 수 없는 사랑이었기에 그 많은 사랑의 하이쿠를 너에게 선물했어. 빛나게 사랑을 노래하는 하이쿠 시인들의 입을 빌려서라도 네게 말하고 싶었어. 너만을 사랑한다고…… 정말 죽도록 사랑한다고…….” 죽여도 죽지 않는 독하고 독한 사랑, 폭염 같고 광기어린 사랑―가츠라기 쇼우(葛城翔) 덴쇼 2년(1574) 오기마치 천황(正親町天皇) 치세의 일본 사카이(堺) 가츠라기家의 쇼우(翔) 그리고 잃어버린 향기 슈카(失香), 이시다家의 류타(龍太). 일본의 격동기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시대를 관통하는 독하디 독한, 그래서 더 처연하게 아름다웠던 그들의 사랑 이야기. “용서 못해…… 오라버니를 용서하지 못할 거야!” “여기 있어, 내 단검! 오늘 하루 종일 갈아두었으니 날이 설대로 섰겠지. 이제 난, 너를 가질 거다! 죽어도 나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 단검을 내 심장에 찔러 넣어. 죽으면 다시 태어나겠지. 그럼, 그때에도 난 너를 사랑하지…… 이제 두 번 다시 너를 잃지는 않을 거다. ……너를 안고 함께 죽는다 해도…….” ‘분명, 빠져든 길은 알고 있건만…… 돌아 나오는 길을 알 수 없는 독한 사랑. 미궁(迷宮)’ 오늘 사랑에 중독된 나, 미궁 속에 갇혀버린 독하디 독한 이 사랑으로 내 사랑을 해독시킨다. 이혜경의 로맨스 장편 소설 『미궁』 제 1권.
유림왕국이라 불리는 소쇄원의 황태자, 탱자가시 유창이.좌의정 남인 영수의 아들인 한성부 종4품 서윤, 김완.우의정 노론 영수의 아들인 예문관 정8품 수찬, 민영우.정조(이산) 4년, 이들 잘나가는 삼인방이 한성의 밤을 접수한다.그러나 이들을 쫓아다니며 춘화집에 그리는 설공찬이란 자가 나타난다.자신들을 춘화집에 그려 조롱한 설공찬이라는 놈을 잡고 보니 홍안의 어린 도령.설공찬 보늬의 춘화집은 조선을 발칵 뒤집어 놓고,급기야 왕에게 걸려 모조리 청나라로 연행을 가라는 명령이 떨어지는데…….[본 콘텐츠는 15세이용가로 재편집한 콘텐츠입니다]
<저녁이 깊다> ‘평범한 삶의 위대함을 각별하게 보듬다’ 다감하고도 정밀한 시선과 언어의 작가 이혜경이 선보이는 지난 시간, 마음의 무늬로 새긴 비망록 1982년 『세계의 문학』에 중편 「우리들의 떨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일상의 세부와 가려진 삶들의 안팎에 드리운 균열을 다감하고도 예리한 시선으로 포착해온 작가 이혜경이 장편소설 『저녁이 깊다』(문학과지성사, 2014)를 펴냈다. 『길 위의 집』(1995)에 이은 그녀의 두번째 장편소설이다. 단정하고도 섬세한 ‘문장가’ 혹은 ‘문체 미학’으로 정평이 나 있는 작가에게 하나 더 따르는 수식이 있다면 바로 미음완보의 ‘과작’의 작가일 텐데, 이를 다시 한 번 입증하듯, 꼬박 20년을 벼리어 나온 셈이다. 『저녁이 깊다』는 2009년 8월부터 2010년 8월까지, 계간 『문학과사회』에 당시 ‘사금파리’라는 제목으로 연재됐던 작품으로, 4년 만에 책으로 묶여 다시 독자들과 만나게 됐다. 국내 주요 문학상을 두루 수상한 이혜경의 첫 장편과 유수의 단편들이 가족이란 테두리 안에서 빚어지는 애정과 증오, 갈등과 화해의 면면을 이야기해왔다면, 이번 작품은 1960년대 말 지방 소읍의 한 초등학교 6학년 동급생으로 만난 기주와 지표가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개발 중심 70년대를 지나 격동의 80, 90년대를 거쳐 오늘에 이른 현대 한국 사회의 부면을 조명한다.
<기억의 습지>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과 함께하는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열네 번째 책 출간! ■ 이 책에 대하여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신작 시와 소설을 수록하는 월간 『현대문학』의 특집 지면 <현대문학 핀 시리즈>의 열네 번째 소설선, 『기억의 습지』가 출간되었다. 2018년 7월호 『현대문학』에 발표한 소설을 퇴고해 내놓는 이번 소설은 2014년 발표한 『저녁이 깊다』 이후 5년 만에 출간되는 이혜경의 신작 소설이다. 자의와 상관없이 전선戰線에 던져졌던 두 남자의 삶에 제각기 음습하게 드리워진 전쟁의 트라우마와 그 상흔이 역사의 참담한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극적 결말로 삶의 비애를 느끼게 하는 가슴 아픈 소설이다. 시골 작은 마을에 낙향에 살고 있는 필성은 어느 날 자기와 비슷한 처지의 ‘김’을 이웃으로 맞는다. 어두운 과거를 지닌 인물임에 틀림없다는 동네 사람들의 의심에는 아랑곳없이 필성은 그를 자신과 다를 바 없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으로 여기고 곁을 내준다. 몇 차례의 교류 이후 필성은 자신이 베트남 참전 군인이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김 역시 북파공작원이었던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으며 둘 사이에 묘한 연대감이 생긴다. 노인뿐이던 마을에 베트남 새댁이 시집을 오며 마을은 잠시 활기를 띤다. 필성은 새댁이 자신이 월남전에서 한때 마음을 줬던 여인 응웬과 이름이 같다는 사실을 알고 왠지 모를 설렘을 느낀다. 그날 이후 필성은 잊었던 베트남 말을 하나씩 복기하며 응웬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필성이 ‘퐁니’에 주둔했다는 사실을 안 이후 응웬은 그와 거리를 두고, 대대적인 민간이 학살이 퐁니에서 자행된 건 그가 한국으로 돌아오고 난 이후였으나 이런 오해를 풀 길이 없어 필성은 답답하기만 하다. 마을에 무료로 영정 사진을 찍어주는 행사가 열리고 필성은 그 자리에 김을 초대하지만 김은 자신의 장례식에 올 사람 하나 없다며 마땅치 않아 한다. 못 이기는 척 마을회관에 온 김은 필성의 옷을 빌려 입고 사진을 찍고, 모처럼 제대로 된 밥상을 받으며 사람들의 온기를 느낀다. 하지만 며칠 후 다시 찾은 마을회관에서 허수아비 취급을 받은 김은 필성을 찾아 불만을 토로하고, 나라를 위해 북파 공작원의 임무를 수행했지만 제대로 된 대접 한 번 받아보지 못한 자기의 처지가 떠올라 서글프기만 하다. 한국에 정착하고자 읍내 한국어 교실에 나가는 등 이국의 외로운 삶을 달래고 있는 응웬은 자신을 향한 시어머니의 시선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한국 생활에 적응하면 홀연 사라지고 마는 많은 이주 며느리들을 봐온 시어머니이기에 응웬의 일거수일투족은 다 조심스럽고 위태로울 뿐이다. 그런 가운데 베트남 말로 인사를 해주는 필성은 응웬에게 작은 위로가 되지만 필성이 퐁니에 주둔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크게 실망할 뿐이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군인 ‘필성’, 북파공작원 ‘김’, 결혼해 한국으로 이주한 베트남 새댁 ‘응웬’, 이 세 명의 인물은 역사로부터 피해를 입었으나 역사로부터 소외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소설은 바로 그 역사가 가하는 소외의 냉혹함을 일깨우며 망각의 역설과 싸우고 있다.”(정홍수). 세 명의 주인공의 삶을 통해 그 소외와 맞서는 문학의 자리를 살펴볼 수 있는 소설이다.
<길 위의 집> <추천평> 이혜경의 소설이 지니고 있는 슬픔의 힘은 그녀의 소설을 이끄는 순정성의 미학에서 비롯한다. 요컨대 그녀의 소설에서 배어나오는 슬픔은 그녀의 소설이 지나치게 착하다는 점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지나친 착함은 "길 위의 집"을 읽는 내내 우리의 마음을 때로는 따뜻하게 때로는 불편하게 만든다. 지나치게 착하다는 것, 그것은 어떻게 보면 삶이 안겨주는 고통에 대해 그만큼 무방어적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원망과 미움을 모르는 마음,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 고통을 피해가거나 영악스럽게 저항할 줄 모르는 마음, 이혜경의 소설 속에서 드러나는 그 순정한 마음의 한 자락이 우리를 슬프게도 하고 불편하게도 하는 것이다. - 박혜경 (문학평론가) 삶의 슬픔을 껴안는 여성적 시선, 이혜경 문학 세계의 대표작. 1995 <오늘의 작가상>, 2004 독일 <리베라투르상> 수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