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령
김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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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판 | 연

가슴 설레고, 떨리는 것만이 사랑인 것은 아니다.때로는 너무 오래되어 익숙하고, 편안하고, 그래서 더 이상 설레지도 떨리지도 않는 것이 당신이 그토록 찾고 있던,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당신이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세상에 단 하나뿐인 당신의 운명일 수도 있다.“괜찮습니까?”인호는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건드리려다 말았다. 옹송그린, 가...

별이 빛나는 밤에

그날 그녀가 전해주는 따뜻한 기운에 오랜만에 모처럼 즐거웠다.즐겁게 사는 것, 그것은 생각보다 훨씬 쉬웠다.좋은 사람과 함께 있으면 흘러가는 시간이 아주 자연히,그가 굳이 억지로 의도하지 않아도, 즐거움으로, 아쉬움으로 물든다.이 간단한 진리를 이제야 깨닫다니.다정하고 멋진 이혼남 장현성. 그의 귀여운 딸 수정이.그리고 수정이의 과외선생님 김순정.그와 그녀...

연(緣)

가슴 설레고, 떨리는 것만이 사랑인 것은 아니다.때로는 너무 오래되어 익숙하고, 편안하고, 그래서 더 이상 설레지도 떨리지도 않는 것이 당신이 그토록 찾고 있던,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당신이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세상에 단 하나뿐인 당신의 운명일 수도 있다.“괜찮습니까?”인호는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건드리려다 말았다. 옹송그린, 가냘픈 어깨가 바들바들 떨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 여자는 지금 겁에 질려 있지.인호는 그녀의 코앞에 손수건을 들이밀었다.“자요.”안쓰러운 마음에 손수건으로 그 자국을 꾹꾹 눌러 닦아주었다.그리고 손을 내밀었다.“일어설 수 있겠어요? 서에 같이 가주셔야 될 것 같습니다만…….”그녀는 손을 뻗어 가볍게 인호의 손을 잡았다. 작고 부드러운 손이었다.하지만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또한 얕은 떨림이, 흐느낌이 그대로 느껴졌다. 인호는 자연스럽게 손을 그녀의 어깨에 둘러 부축하였다.연한 향기가 풍겨왔다. 달콤하고, 새콤한 그 옅은 향이 화장품 냄새가 아니고 그저 그녀의 체취라는 것을 한참 뒤에야 깨닫게 되었다

수정의 인사

<수정의 인사> “나한테 왜 그랬어요? 한대리님을 사랑한 거 말고, 제가 잘못한 일이 뭐가 있어요?” 출판진흥원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이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나무 크라우드펀딩 매칭지원사업 선정작 소설의 주인공은 이제 스물아홉 살, 한주은행 연정시장지점의 한수정 대리다. 약사인 아버지와 공인중개사였으나 지금은 아버지의 약국에서 사무원으로 일하는 엄마, 그리고 두 여동생이 있다. 수정은 딸 셋 중 장녀. 그러니까 한수정 대리는 너무나 평범한 내 친구의 모습이자 어쩌면 나다. 그런데 참 이상도 하지. 혼자 하는 것도 사랑일까? 연정시장 명물로 소문난 날개떡볶이집 사장 철규는 지치지도 않고 한수정 대리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매일매일 현금이 꽉 찬 짝퉁 루이뷔통 가죽가방을 들고 입금을 하러 와선 금팔찌와 금목걸이를 노랗게 번쩍이며 수작을 건다. 속이 느물거릴 지경이지만 은행 고객이니 그저 웃어주었을 뿐인데 은행 사람들도, 시장 사람들도 농지거리 섞듯 한 마디씩 한다. “은행 아가씨가 너무 튕기네! 철규 사장한테 시집 가면 평생 공주 대접 받을 텐데!” 딱 한 번 야멸차게 거절한 뒤 2주가 지난 날, 날개떡볶이집 사장 철규는 수정을 따라왔다. 11월의 스산한 밤인데 맨발에다 슬리퍼만 신은 채로. 그리고 원룸 건물로 달아나는 수정을 붙잡고 물었다. “나한테 왜 그랬어요? 한대리님을 사랑한 거 말고, 제가 잘못한 일이 뭐가 있어요?” 수정은 몰랐다. 사랑하고 싶을 때 사랑하고 거절하고 싶을 때 거절하는 일이 그토록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철규는 짝퉁 루이뷔통 가방에서 망치를 꺼냈고 수정을 내리쳤다. 왜 이러냐고 따지고도 싶었고 하고 많은 은행 중 연정을 택한 것도 후회하고 싶었지만 수정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수정은 그날 죽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냥 김사장이랑 살지, 뭘 그리 쟀나 몰라. 돈 많지, 성실하지, 심성 곱지. 김사장이랑 연정에서 자리잡고 살면 좋았겠고만, 거참.” “남자들이 원래 다 그렇잖아. 마음 줄 거 다 줬는데 그리 안 받아주니 회까닥 돈 거야. 딱해라, 딱해. 젊은 놈이. 그 병든 엄마는 어쩌누? 이제 누가 돌봐?” 가해자에게만 부여되는 기나긴 서사. 그 속에서 철규는 노모를 돌보며 열정적으로 떡볶이집을 꾸려가는 성실한 사람이었고, 은행원 수정에게 반해 밑도 끝도 없이 들이대다 상처를 받은 순정한 청년이었다. 사람들은 혀를 쯔쯔 차며 중얼거린다. “죽은 애가 불쌍해도 산 사람은 또 살아야지.” 죽은 자의 억울함과 유가족의 슬픔은 그렇게 내내 모욕당하고 있었다. 작가 김서령은 특유의 담담하고 고요한 문장으로 죽은 자의 목소리를 받아썼다. 소설은 한수정 대리의 목소리 그대로다. 수정은 경찰 조사를 지켜보고 재판정에 함께 서고 신문 기사를 우리와 함께 읽는다. 그래서 수정의 후회는 뼈아프다. 그 사람 앞에서 웃지 말걸. 처음부터 매몰차게 거절할걸. 그걸 못 해 혼자 먼 길을 가야 하는 수정의 마음이 경장편소설에 가득 담겼다. 『수정의 인사』는 2021년 출판진흥원이 주관하는 우수출판콘텐츠에 선정되었고 같은 시기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관하는 예술나무 펀딩 지원작으로도 선정되었다.

연애의 결말

<연애의 결말> “승호와 내가 헤어지는 과정은 우리가 얼토당토않게 사랑에 빠졌던 일처럼 자연스러웠다. 사랑에 빠지는 일이 우리를 구원했던 것처럼 다시 구원받기 위해서는 이별도 필요했다.” 산뜻한 소설과 반짝이는 일러스트의 컬래버레이션을 표방하는 폴앤니나 소설 시리즈의 세 번째 책. 노정이 쓰고 드로잉메리가 그린 장편소설 『달콤한 밤 되세요』, 현진건문학상 수상작가 최예지가 쓰고 살구가 그린 소설집 『애비로드』에 이은 폴앤니나 소설 시리즈 003 『연애의 결말』이다. 현대문학 신인상으로 데뷔해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티타티타』 『어디로 갈까요』 등을 출간하며 오랜 시간 문단의 신뢰를 받아온 작가 김서령의 단편 6편이 실렸으며, 네이버 그라폴리오 인기 작가 제딧이 일러스트 열두 컷을 그렸다. 『연애의 결말』은 출판진흥원의 우수출판콘텐츠로 선정되기도 했다. 여전히 다정하고 친근한 김서령의 문장들을 만나다 상처인 줄도 모르고 상처를 안고 사는 이들을 세심하게 어루만지는 소설로 주목받았던 작가 김서령의 따뜻함은 이번 소설집에서도 여전하다. 이미 끝장난 연애인 줄도 모르고 내처 달리기만 하는 사람들, 어떻게 하면 이 지리멸렬한 연애를 끝장낼 수 있는지 몰라 여태 서성이는 사람들, 이게 사랑인 줄도 모르고 사랑이 아닌 줄도 몰라 내내 어리둥절한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를 김서령은 살갑게도 풀어낸다. 작가의 조근조근한 목소리를 곁에서 듣는 듯한 건 김서령 소설만의 매력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