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얀 여름 햇살. 아름다운 얼굴. 아직 완성되지 못한 목소리. 꿈속에서 만난 그는 예전에 과외했던 제자, 기선호였다. 한여름의 더위에 사그라드는 초여름의 풋풋함이었다. 찰나일 뿐인 만남. 다시 그와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은조는 생각했다. 그랬는데……. “오랜만이에요, 선생님.” 11년 만에 만난, 아니 오늘 아침 꿈속에 나타났던 그가 상사가 되어 찾아왔다. “앞으로 서른인 나한테 익숙해져야 할 거예요.” 내밀어진 손은 풋풋함을 지운 강인한 손,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그 눈동자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 은조는 알 수 있었다. 《다시 만난 제자》
“목적이 뭐야?” 해수는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준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못 알아듣는 척하지 말고.” “20억 때문이야?” 해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너한테 넘어올 때까지 기다려서 20억을 받아 내려고 한 거 아니냐고.” “아니에요.” “아니긴. 내가 20억 준다고 할 때까지 아무 말도 안 했으면서.” 해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역시 구린 구석이 있는 게 분명했다. “지금까지 입 닫고 있었던 이유가 뭐냐고.” 고개를 숙인 해수는 입을 열지 않았다. 준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몸만, 좋아요.” “뭐?” “몸만 좋다고요. 몸만.” “이제 보니 20억은 내가 아니라 네가 줘야겠네.” 준원은 당돌하게 제 몸이 좋다는 여자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참, 넌 돈이 없지.” 준원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자의 곁으로 다가가 손등으로 자그마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갈색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몸으로 때워.” “……네?” “계약 기간 끝날 때까지 몸으로 때우라고.” 해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준원을 빤히 쳐다보았다. “오늘부터 갚아.” 준원이 해수의 몸을 가린 시트를 걷어 냈다. 《부부의 탄생》
“내 사람이 되겠다며. 벌써 잊은 건가.” GK그룹의 장손이자 유력한 후계자인 황재현. 그의 비서이자 이중 스파이인 우서영. 감시 대상이었던 재현을 사랑하게 된 서영은 은인을 배신하고 그의 여자가 되었다. 재현과의 밀회를 즐기며 이중 스파이로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살아가던 어느 날. 서영은 재현의 약혼 소식을 듣게 되는데……. “……약혼하신다면서요.” “그게 뭐?” “네?” “변하는 건 없어.” 서영과의 관계를 끝낼 생각이 없는 재현. 최악으로 가정했던 일이 현실이 되자 서영은 결심했다. 그의 곁에서 떠나기로. *** 스르르 눈을 감자 입술이 맞물렸다.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놓은 재현이 고개를 비틀어 깊이 파고들었다. 서영은 거침없이 입술을 가르고 밀려 들어오는 남자의 혀를 순순히 받아주었다. 혀끝에 와인이 남아 있었는지 떫은맛이 느껴졌다. 고급스러운 풍미를 지니고 있지만 달콤하지는 않은. 그게 꼭 이 남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에게 달콤함은 절대 내어 주지 않을 남자였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틈날 때마다 되새겼다. 자신은 그저 부하직원이자 잠자리 파트너일 뿐이라는 걸. 그는 제게 조금의 마음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끔 기대를 품을 때가 있었다. 조금은 아주 조금은 저를 바라봐 주지 않을까 하는. 이렇게 몸을 섞다가 마음 한 조각 내어 주지 않을까 하는. 그런 어리석은 기대를.
“그 여자가 하는 말, 들을 필요 없어.” 진성그룹 후계자인 태경은 돈을,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던 재이는 인생을. 서로 가지고 있는 것을 맞바꾼 계약 결혼이었다. “시집살이는 계약 조항에 없으니까.” 손님이 있는 자리에서 시모에게 모욕을 당하고 시모의 속옷을 손수 빨래하는 수모를 당하더라도 모두 받아들여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기 전까지는. “그거 알아? 네가 울면 키스하고 싶어지는 거.” “…….” “그러니까 밖에서 키스하기 싫으면 조심해.” 차갑고 무심하기만 했던 태경이 다가올 때마다 다정하게 입맞추고 따뜻하게 위로할 때마다 재이는 그에게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그와 진짜 부부가 되고 싶었다. 그의 아이를 갖고 싶었다. * 고개를 내린 그가 재이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노력하는 시늉은 해야지.” 그 말을 끝으로 재이의 귓불이 그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간지러운 느낌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재이의 숨결이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몸을 가리고 있던 시트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지난밤처럼 태경의 얼굴이 정면에서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아몬드형의 길쭉한 눈매가 반으로 접히며 부드럽게 휘어졌다. “잘할게.”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재이는 눈을 감았다. 달콤한 거짓말이라도 싫지는 않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