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를 실어 오는 바람> 연(戀). 연(緣). 불망(不忘). 잊을 수 없는 그리움, 끝나지 않은 인연. 서로를 알지 못한 채 마음으로만 품었던 여름. 시조를 부채에 적어 겨우 마음을 전했던 가을. 대문 앞, 적혀 있는 이름자 하나에 설레었던 겨울. 정인과의 재회를 기뻐할 수 없었던 초봄. “이만 가시오. 이 밤, 함께하지 않아도 관계치 않소.” “부디 이 순간만큼은 여기에 머물러 주세요.” 자신 때문에 흘린 피를 잊을 수 없기에 연정을 억눌러 그리움의 깊이만큼 매정한 말을 내뱉고 연을 사랑하는 마음만큼 조소를 보냈다. 그런다고 해서 연모의 정이 수그러들지는 않았다. “전하께서도 꿈인 듯 찾아와 주시면 좋겠구나.” “잊지 마오. 시내가 흘러드는 바다 끝에 태양이 떠오름을.” 연이 마지막으로 그의 이름을 떠올렸다. 홍위(弘暐). 이름처럼 그는 언제나 그녀의 곁에 있었다. <목차> 一. 신미년(辛未年) 1. 봄빛 스미는 순간 2. 대나무 사이로 맑은 바람 일거든 二. 임신년(壬申年) 3. 이별의 눈물 더하거늘 4. 달이 기운 연후에 三. 계유년(癸酉年) 5. 홍사(紅絲) 끝 닿을 줄 모르고 6. 바람이 그치면 四. 갑술년(甲戌年) 7. 선연(善緣)이 악연(惡緣) 되어 8. 그리움은 쌓여 가는데 五. 을해년(乙亥年) 9. 달빛 스러지니 햇살 시리어라 10. 살얼음 딛고 서서 六. 병자년(丙子年) 11. 용오름 한가운데 七. 정축년(丁丑年) 12. 바람에 실려 결(結). 시내 흘러드는 바다 끝에서 작가 후기
<등꽃 향기 흐드러지면> 연(戀). 연(緣). 불망(不忘). 잊을 수 없는 그리움, 끝나지 않은 인연. 정에 굶주린 눈빛을 보내던 계집아이가 언제 의젓한 아가씨처럼 달라졌을까. 누이라 여기던 마음이 과거가 되었음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소녀를 어찌 생각하십니까.” “한 손으로도 번쩍 안아들 수 있던 고운 누이였지.” 제가 팔을 뻗어 유화를 당겨 안았다. 더 가까이, 더 세게 안고 싶어지는 마음을 참아내며 몇 번이나 제 마음을 부정했다. “취중인 듯 몽중인 듯, 이 밤을 내어 주옵소서.” “정인을 맞이하는데 어찌 흐린 정신으로 있을 수 있겠느냐.” 누이였다.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여인이었다. 다시 만난 이후로는. “지금껏 그 누구도 마음에 품은 적이 없었다.”
<치마폭에 담긴 붉은 그리움> 연(戀). 연(緣). 불망(不忘). 잊을 수 없는 그리움, 끝나지 않은 인연. “여의초(如意草). 내 뜻을 네게 주는 것이야.” 철모르는 아이, 연정을 품은 청년이 꽃줄기에 담은 기원은 단 하나였다. 평생토록 마음 깊이 간직한 이도 단 하나뿐이었다. “단언하건대, 제비꽃이 으뜸이었소. 모란도 난초도 곱기는 하나 제비꽃에 비할 수는 없었다오.” 어릴 때부터 마음에 품어 온 정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설레던 단 한 명의 여인. “혹여 마음에 그리움이 깃드는 날이 있거든, 기억하여 주옵소서.” 들판에는 지천으로 널린 제비꽃이 어찌하여 궐에는 없을까. ‘언젠가 그날이 온다면 지체하지 않고 달려가겠소, 부인.’ 부디 그날이 너무 늦지 않기를.
<그대에게 내리나니> 웅장하고 호화로운 저택, 담 안을 떠도는 우아한 음악 소리, 은은한 향기가 감도는 고상한 분위기의 방. 찰나의 망설임으로 발걸음을 옮긴 그곳에서 여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고운 용모의 사내와 마주하였다. “곧 머리를 얹어야 하는 동기(童妓) 아니더냐. 나는 네가 여기 있는 까닭이 그 때문인 줄 알았는데.” 환이 입가에 비뚜름한 미소를 건 채로 손을 뻗어 유연의 턱을 가볍게 받쳐 들고 얼굴을 가까이 했다. 숨결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놓인 까만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을 차게 응시하고 있었다. “다시 만날 수 있겠느냐.” 대답을 재촉하듯 계속해서 주변을 맴도는 목소리를 견디다 못한 유연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늦은 대답을 했다. “다시는 만날 일이 없겠지요.” 무엇이 그리도 서러운지 유연으로서는 깨달을 수 없었다. 다정한 손길에 눈물이 그칠 줄 모르고 흘러나왔다.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만 마음으로 되뇌었다. ‘마음이 예전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