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혼> 믿지 않는 사내. 그의 냉정한 침착함을 불변이라 믿은 여인. 열아홉 해가 넘도록 24시간 철없는 말괄량이 이연화와 사랑에 있어서는 철부지인 윤지겸의 답답한 조선 남녀 상열 지사. -본문 중에서- “무슨 짓이냐.” 노기가 묻은 냉랭한 목소리로 조용히 내뱉었지만 평소와 다르게 연화는 겁먹지 않았다. “나으리, 부디…….” 그녀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다시 그녀의 어깨를 밀어보았지만 작정이라도 한 듯 떨어지지 않았다. “제가 마음에 안 차십니까?” 입고 있던 철릭에 그녀 얼굴이 반쯤 묻힌 탓에 목소리가 먹먹했다. “그만 물러서라.” “제가 그리도 못마땅하십니까?” “물러서라 하지 않았느냐.” 팔을 풀고 물러선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옷에 묻은 물기로 보아 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겸의 마음 한 자락에 깊은 골이 패는 것 같았다. “제가 대체 어찌하여야 나으리 마음 한 자락이라도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 “어찌하여야 눈길 한 번 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 “늦었다. 돌아가거라.” “제가 그리도……싫으십니까? 이러는 게, 그리도……못된 것입니까.” “감군(監軍)을 부를 테니 함께 돌아가거라.” 지겸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아니 갈 것입니다.” 재빠르게 덧붙이는 물 먹은 음성은 흡사 비명처럼 들렸다.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걸었다. 끊어내도, 끊어내도 다가오는 그 발걸음이 안타까웠지만 두려웠다. “며칠이고 몇 달이고 기다릴 것입니다. 나리께서 절 보실 때까지 여기 있을 것입니다. 쫓아내시면 다시 들어올 것입니다. 염단(念斷)하실 때까지 찾아올 것입니다. 소녀를 부르실 때까지 그만두지 않을 것입니…….” “무엄하구나.” 굴곡 없는 아주 조용한 목소리였는데도 불구하고 연화의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쉬지 않고 내뱉은 여인의 말이 다시 한 번 뇌리에 새기듯 박혔다. 지겸은 휙 돌아섰다. “웃어른에게 장난질을 하는 것을 이만하면 오래 참았다고 생각하느니. 이제 그만두어라.” 등롱을 굳이 가까이 가져가지 않아도 그녀의 얼굴 표정이 어떨지 알고도 남았다. 허나, 잘라낼 것은 잘라내야 하는 법. 지겸은 내친 김에 확실히 매듭을 지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연모의 정은 때가 되면 변하는 것이다. 거짓으로 쉬이 말할 수 있는 것이야. 젊은 혈기에 휩쓸려 한때 가졌던 감정으로 방자하게 굴지 마라.” “한때라도 좋습니다. 변해도 좋습니다. 받아 주시면 아니 되옵니까? 이 진심을, 지금만이라도 좋으니 받아 주시면 아니 되옵니까?” “짐스럽다.” 거짓말처럼 여인의 말대답도, 약한 흐느낌도, 거칠던 숨소리도 끊어졌다. 뻣뻣이 굳어 버린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돌아섰다. “나는 그런 네가 짐스럽다. 불편해. 늘 그랬어.”
<자미궁> 빼어난 미모의 여인 유선암과 능글맞은 김이정의 조금은 슬픈 사랑 이야기 -본문 중에서- “그래서 얻어온 것이 이 돌덩이란 말이더냐?”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나으리께서는 어찌하여 또 이곳에 발길하신 것입니까?” 이정은 대답 없이 푸르스름한 빛을 내뿜는 돌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도성 문 닫히기 전에 돌아가시지 그러십니까?” “닫히면 여기서 자고 가면 되지, 무얼.” 선암이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정은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돌을 세심하게 뜯어보았다. “이 돌 말이다, 어째 느낌이 이상하지 않느냐?” 선암은 움찔 놀라며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어찌 이상하다는 것입니까?” “어째 돌이 나를 싫어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말이다. 바람 소리도 좀 나는 것 같고……. 도깨비불들이 찾던 돌이라 그런지 귀기(鬼氣)스럽기도 하고 말이다.” 여느 양반치고는 감각이 예리한 양반이었다, 이 양반은. “귀물(鬼物), 맞습니다.” “무어?” 이정은 깜짝 놀라 돌을 방바닥에 떨어뜨렸다. 선암이 그것을 주워 치맛자락으로 쓱쓱 닦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귀왕의 부’입니다.” “‘귀왕의 부?’ 귀신들 왕? 귀왕의 표식이라고?” “예.” “그런데 이게 왜 여기 있어? 아니, 애초에 왜 돌덩어리인 것이야?” “강가에서 햇빛이라도 받고 자려고 돌로 변신한 것이겠지요. 낚시꾼들 발에 채여 물속으로 굴러떨어졌다가 건져진 것일 것입니다. 수수범벅을 바치고 나서 유독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강에서 주운 것이라니 틀림없을 것입니다.” “벼, 벼, 벼언시인?” “돌덩이처럼 보여도 도깨비들의 왕입니다. 도깨비 왕정도 되면 둔갑도 할 수 있습니다. 불로만 변하는 것은 유도 아니지요. 도깨비들이 수수범벅을 좋아한다고 하니 그것을 바치고 어로를 풍성하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정은 방바닥에 놓아둔 돌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히야, 이것이 도깨비 왕이란 말이지. 그런데 왜 본래 모습으로 둔갑을 아니 하는 것일까?” “일단은, 사람 손에 너무 오래 있었습니다. 기운을 잃고 잠이라도 자고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다른 도깨비들을 기다리는 것이겠지요. 문갑 속에 오래 있었으니 길을 인도해 줄 이들이 있어야 쉬이 돌아갈 터이니까요.” “기껏해야 보름 좀 넘게 있지 않았던가?” “방향을 잃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니 이상한 것도 아닐 겁니다. 아무튼, 나리께서는 얼른 돌아가셔요. 곧 광희문 닫힙니다.” “퇴궐하고 힘들게 왔는데 밥 한 그릇, 차 한 잔 아니 주고서는 그냥 가라는 말이더냐?” 선암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가 나리 댁입니까, 주막입니까? 하다못해 주막에서는 돈 받고 국밥 팝니다. 기방에서는 돈 받고 차를 내는 법이고요. 굿값 물어보러 오신 손님도 아니시면서 밥을 달라니 너무 철면피 같단 생각 안 드십니까?” “내 자네를 동기간 같이 생각한다 하지 않았어? 아우 같은 이를 만나러 왔는데 밥값을 받겠다니, 너무 야박하지 않은가?” “저는 나으리 같은 오라비 둔 적 없습니다.” “에이, 왜 그러나, 아우님. 내 아우님을 얼마나 귀애하는데.” “사양하겠습니다. 귀애하지 않으셔도 되니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지 좀 마십시오. 오늘은 산술 공부하는 날도 아닌데 왜 오신 것입니까?” 이정에게 가짜 유선재 행적을 들킨 후, 그것을 빌미로 이정이 요구한 것은 산학 공부였다. 선재가 살아 있을 적에 놀이처럼 머리를 맞대고 공부하던 것이 산학이라, 선암은 꽤 높은 수준까지 배울 수 있었다. “왜긴, 도깨비불을 어떻게 했나 궁금해서 왔지.” “여긴 나리 놀이터가 아닙니다. 함부로 찾아오지 마십시오.” “이봐, 아우님. 내가 야행 길에 호위도 해주고 했지 않은가? 옛 정을 생각해서 좀…….” “옛 정이라니요? 나리와 면식을 튼 지 한 해도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에이, 서운관에서 같이 공무도 본 사이 아닌가? 야박하게 그러지 말게.” 선암은 고개를 외로 돌리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도대체 한마디를 안 지네.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그보다 아우님, 이 돌을 어찌하실 생각이신가?” “돌려주어야지요.” “돌려주어?” “내일쯤 서소문 밖으로 나갈까, 도깨비불이 이리로 오도록 한 열흘쯤 기다릴까 생각 중입니다.” “내일 나가보자꾸나. 밤길을 걱정 마라. 내 통…….” “통부 훔쳐서 나으리께서 따라올까 가장 걱정입니다.” 이정은 배싯 웃었다. “그게 다 너를 위해서,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서…….” “곧 문 닫힙니다. 아니 가실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