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눈떠보니 자신이 쓴 책 속, 등장인물 라비나가 된 서경. 라비나는 남주에게 죽임을 당할 운명. 죽음만은 피하고자 갖은 노력을 했음에도 라비나의 결말은 늘 같았다. “아니. 아파. 어떻게 하면 널 지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널 사랑받게 할 수 있을까. 내 남주. 내가. 사랑하는 내 남주.” 바뀌지 않는 결말에 절망하던 서경은 다섯 번째 얻은 삶에서. “죽지 마. 내 옆에 있어. 무서워할 거 없어. 내가, 지켜줄게.” “키스… 해도 돼?” 달라진 남주의 태도에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어어? 얘가 이런 말 하는 남자가 아닌데? 라비나와의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에 그런 거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다정해져 버린 마할딘. 애절하게 곁에 있어 달라고 애원하더니 “죽지 마. 사라지지 마. 라비나.” 집착남이 되어 찰싹 달라붙어, 이제는 잠자리까지 하잔다. “꼭 시침 시녀한테 교육받아야 하는 거야? 지금까지는 뭐든 다 네가 가르쳐줬잖아. 라비나. 내가 성인 남자가 되는데. 왜 그걸 다른 여자한테 배워야 한다고 하는 거지? 네가 가르쳐 주면 안 돼?”
“내 죄가 많아 모두가 고통을 받는구나. 나 하나만 없어지면 될 것을.”세자 겸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폐서인이 된 서린은 모든 것을 잃은 날, 붉은 노을 아래 절벽으로 몸을 던졌다.눈을 떠 보니 첫날밤이었다.서린은 겸이 자신을 버리고 정인의 궁으로 도망갔던 바로 그 날로 회귀한 것이다.“그대와 가례를 치렀으나, 내 그대의 사내가 될 일은 없을 것이오.”똑같은 상황, 반복되는 차가운 세자의 말.어차피 도망칠 것, 먼저 내보내드려야겠다.“합방에 관하여서는 관상감에 길일을 택하라 언질을 넣어둘 터이니 날짜가 나올 때까지는 후궁에서 편히 쉬시옵소서.”신방에서 쫓겨난 겸은 분노하고 서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서린은 겸이 품었던 비밀스런 상처가 무엇이었는지를 깨닫는다.이해되니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았다.지난 생, 그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았더라면 조금은 달랐을까.어쩌면 이제라도 달라질 수 있을지 모르지. 내가 온전히 그를 바라는 마음만 내려놓으면.파멸을 피하기 위해 이전과 다른 생을 살리라.마음 먹은 서린은 겸에게 선언했다.“소첩은 저하를 마음 깊이 연모하지도, 후사를 조르지도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