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친구로라도 당신 곁에 머무르면 안 될까.” 그가 속삭이는 사랑이 착각임을 알기에 한낱 조연으로 환생한 나는 미련 없이 이혼을 택했다. “난 언제나 당신 뒤를 따를 거야. 그러니 준비가 되면 그때 뒤를 돌아봐. 그곳엔 항상 내가 있을 테니까.” 달콤한 말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그에게는 진정한 사랑이 있음을, 곧 나타날 여주인공과 사랑에 빠질 것임을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겼다. “나는 필요에 의해 맺어진 관계 속에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지 않아.” “가지 마. 이번에야말로 날 떠날 거잖아. 영영 내 손에, 잡혀 주지 않을 거잖아.”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필사적으로 붙잡아오는 그. 나는 다시 한번 이 손을 뿌리칠 수 있을까.
황녀 발레리 벨로프. 선황제의 늦둥이 딸로 태어난 그녀는 어미인 선황비에게 오랫동안 학대를 받았다. 더 자란 뒤에는, 어미가 지은 죄로 인해 얼어붙은 설산에 유배당하기까지 한다. 불행히도 비극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아주 오래 전, 설산에서 죽임당한 괴물의 능력을 갖게 된 것이다. 많은 이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바로 그 빙결 능력을. ‘모두에게 배척받는 힘까지 갖게 되다니…… 이 삶을 더 이어갈 의미가 있을까?’ 마음을 먹기 무섭게 서늘한 기운이 그녀의 몸을 감쌌다. *** 분명 그대로 죽었을 텐데……. 눈을 뜬 발레리의 시야에 들어온 건 처형당했던 제 어미, 앨리시아였다. 자신이 빙결 능력을 가진 채 9살의 어린 시절로 돌아왔다는 걸 깨달은 발레리는 과거와 똑같이 살 순 없다는 생각에, 황제이자 이복오빠인 밀러드에게로 도망친다. “폐하. 제발 저를 구해 주세요! 시키시는 건 뭐든 다 할게요. 제발, 저 좀 살려 주세요…….” 그리고 그날을 기점으로 발레리의 삶은 달라졌다. “혼내실 거예요?” “……아니.” 엄격해 보이던 첫째 오빠는 애교 한 번에 녹아내렸고, “얼마야! 얼마면 돼!”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던 둘째 오빠는 발레리의 말이라면 백지 수표에 사인이라도 해 줄 기세였다. 그렇게 꿈 같은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발레리는 세상과 단절된 채 능력을 숨기고 살아가던, 마치 예전의 자신을 보는 것 같은 아이를 만난다. “안녕, 괴물.” 입을 여는 순간, 웅크려 있던 아레스의 안광이 살기로 번뜩이며 날카롭게 솟은 그림자가 쇄도했다. 즉시 빙벽을 세워 심장을 꿰뚫을 듯 날아든 그것을 막아내자, 아이는 놀라 움직임을 멈추었다. “나도 너와 같은 괴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