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잃은 그룹의 상속녀 지수연 앞에 어느 날 한 남자가 나타났다.“난 당신을 믿지 않아요.”“마찬가지야. 그 이상은 성가시기만 하고.” 건성으로 대꾸하는 그가 느릿하게 시선을 들었다.국가의 비자금 증서를 가진 채 기억을 잃은 여자, 지수연.비자금 증서가 목적인 국가 정보국 요원, 고태준.서로를 믿지 않는 두 사람의 은밀한 계약이 시작된다.* * *“도와 달라고 해 봐.”그 순간, 수연의 뺨이 당혹스럽게 굳었다.내리꽂히는 태준의 눈빛이 냉랭하게 차가웠다. 이런 자신을 따끔하게 혼내기라도 하듯 다그치는 태준의 눈빛에 수연이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가지 마. 해 보라고.”그럼에도 선심이라도 쓰듯이 느긋하게 쳐다보는 그의 눈동자에 심장이 따끔하게 뛰었다.해 봐. 내가 널 도와줄 테니까.그런 그를 보며 기분이 묘했다.그래도 될까. 이내 혼자만 들릴 정도의 작은 읊조림이 선명하게 울렸다.“도와줘요.”빙글거리는 그의 눈빛이 희미하게 치솟는 웃음으로 바뀌어 갈 무렵이었다.“가지 말아요.”마찬가지로 그의 입매가 느른하게 치솟았다.모든 감정의 시작은 놀이였다.콧대가 높은 건지, 자존심이 센 건지, 아니면 무식할 정도로 무모한 건지.단순히 확인하고 싶어 시작한 오만한 놀이.그 장난 같은 불꽃 한 줄기가 그의 모든 것을 집어 삼킬 불길이 될 줄은 그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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