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문학선: 주리야 (이효석 20)

한국근대문학선: 주리야 (이효석 20)

<한국근대문학선: 주리야 (이효석 20)> 연말을 끼고 정리되지 못한 여러 가지 일에 분주한 주화는 종일 회관에서 일을 보다가 조그만 셋방으로 돌아오니 누운 채 깊은 잠이 폭 들었다. 깊은 잠속에 꿈이 새어들고 꿈속 에서 그는 의외에도 한 여성의 방문을 받았다. 너무도 의외 의 인물의 방문에 의아하여 꿈속에서도 그는 눈을 비비고 그를 다시 바라보고 두번째 만나는 그 아름다운 여성의 자 태에 현혹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두어 주일 전에 동무들 과 같이 고향인 관북 방면에 유물론 강연을 갔을 때 S항구 에서 만난 그 여자인 것이다. 가는 곳마다 청중이 적음을 탄식하던 끝에 S항구라 예측 이상의 활기에 기운을 얻은 그 는 강연을 마친 후에 여관에서 그의 강연에 공명한 한 나어 린 아름다운 여성의 방문을 받았던 것이다. 엥겔스 거얼이 라고 부를 정도가 채 못되느니만치 생각은 어렸으나 기개만 은 귀엽다고 생각하였다. 나어린 감격 끝에 그는 가정과 일 신상의 형편까지 일일이 주화에게 이야기하였다. 집안은 거 부는 못되나 어머니와 한 분의 오빠를 섬겨서 그리울 것이 없는 지주의 가정이라는 것, 근방의 여자 고보를 마친 후 근 일년 동안이나 가정에 묻혀 있다는 것, 그의 의사를 무 시한 혼담에 졸려 날마다 우울히 지낸다는 것 등등의 사정 을 기탄없이 이야기한 후, 그러한 완고한 가정을 배반하고 진보적 생각으로 세상을 알아볼 결심이라는 것을 말하고 앞 으로 지도를 바란다는 뜻을 간곡히 다졌다. 그의 진보적 생 각이라는 것의 정도를 짧은 시간에 진맥하기는 어려웠으나 그의 형편에 동정하고 기개를 귀히 여겨 청하는 대로 주화 는 서울의 주소까지 적어 주었던 것이다—비록 꿈속일지라도 이 생각지 않았던 처녀의 방문은 전연 뜻밖이었다. 처녀는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주화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기쁨 인지 슬픔인지 목소리를 놓고 울었다. 울음소리는 점점 높 아갔다. 너무도 돌연한 변에 주화는 어쩔 줄 모르고 무죽거 리는 동안에 문득 꿈에서 깨었다. 스산한 느낌이 전신에 쭉 흘렀다. 어느맘 때인지 전등이 희미하게 비치고 밖에서는 처마를 스치는 눈 소리가 설렁설렁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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