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위가 자는 방> 세상과의 진지한 첫 대면을 하게 되는 소년기는 한 존재의 삶의 시원이다. 삶의 한 굽이를 넘을 때마다 우리는 저마다 소년기에 겪었던 첫경험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고, 마치 잃어버린 열쇠를 찾듯 그곳에서 문제의 해결 방안을 뒤진다. 그렇듯 작가 이명행 씨는, 누구나 갖고 있지만 본인에게는 특별할 수 없는, 소년기의 상처와 사랑, 죽음에 대한 최초의 체험들을 속으로 울음을 삼키듯 간결하게 그려낸다.
그해 장마가 시작된 날이었다. 일 년이 넘게 매달려왔던 일을 마무리하고 난 뒤, 허전하고 처량해져 마음둘 곳 모르던 주인공 나는 마치 전혀 다른 세계에 와 있는 것 같은 혼란에 빠져버린다. 마치 인생에는 여러 개의 켜가 있고, 어쩌다 발을 헛디뎠을 때 그 순간부터 전혀 다른 생을 살게 되어 있는 것처럼.
그 며칠 후, 아내에게서 요즘 잠자리에서 침대가 흔들릴 만큼 몸을 떨면서 "저, 거위! 저 거위!" 하고 잠꼬대를 하면서 눈물을 흘리더란 이야기를 듣는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가을께부터 허전하고 처량한 것이 가슴으로 밀려든 것은. 그리고 내가 묽어지면 묽어질수록 명징하게 차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비로소 나는 그것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호박돌을 성기게 넣어 쌓아올린 토담에 기대어 서서 내게 열두 살이냐고 물었던 그 소년인 철수가 보낸 신호였다는 것을.
이후 주인공 나는 철수와 첫사랑인 그의 누나 영희, 그리고 몸집이 너무 작고 가냘퍼서 뱃속에 가득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 가엾게 느껴졌던 그의 어머니, 양지바른 곳에 기대어 앉아 하루종일 졸고 있는 그의 아버지, 전쟁통에 좌익과 우익 편에 번갈아가며 섰던, 그래서 16년 동안이나 미친놈 노릇을 해온 개백정 할아범을 떠올리면서, 철수의 외로움을 같이하지 못하고 그를 가출로 몰아넣은 것에 부채 의식을 지닌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떠난 운주사 여행길에서 무려 25년 동안이나 침묵하고 있다가 갑자기 자신들의 존재를 알려온 이들에게서 부메랑처럼 다시 내게 날아온, 내 마음속에 있는 어떤 지도 같은, 작게 일렁이는 불빛 같은 것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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