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정조 이산> 정조正祖는 조선의 문물제도를 완숙한 경지로 끌어올린 제왕이다.
정치적으로는 탕평책을 쓰고 문화적으로는 규장각을 설치해 지식인을 양산했다.
이용후생을 실천하고 실사구시를 연구하던 실학자들을 깊이 이해했으며
서학(천주학)이라면 무조건 배척하던 기조에서 벗어나 자연스럽게 수입되기를 바랐다.
한편 왜란과 호란, 붕당 싸움으로 문란해진 정치의 기본구조를 확립하고
새로운 문물과 제도를 마련하고자 절치부심했던 군주였다.
이러한 그가 태어난 것은 영조 28년(1752) 3월이었고
열 살의 나이로 김시묵의 딸과 가례를 올린 것은 1762년 2월이었다.
그로부터 넉 달 뒤, 그의 부친인 사도세자가 폐서인이 되었다가 뒤주 속에서 목숨을 잃은 참변이 일어났다.
이때의 정경을 적나라하게 그린 것이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이다.
뒤주 속에 가둬놓은 동궁이 굶어죽게 되자 영조는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사도세자’라는 시호를 내렸다.
영명을 떨치던 군주인 영조가 저지른 씻지 못할 과오였다.
영조가 친아들을 죽인 이 사건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당파싸움의 희생물이라고, 사가들은 칭한다.
세자가 대리청정을 할 때, 조정은 영조와 세자파로 나뉘어 갈등을 겪었다.
탕평책에도 불구하고 부왕과 세자 사이를 이간 붙이려는 ‘당쟁’은
결국 영조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세자는 뒤주에 갇히고 말았다.
그로부터 여드레 후, 찌는 듯한 무더위와 울분, 갈증과 허기 속에서 세자는 숨을 거두었다.
이것은 탕평책을 내세운 영조의 정책을 무색케 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일은 여기에서 끝난 게 아니었다.
세자가 죽은 뒤에도 음모와 모함은 세손과 영조 사이에서 또다시 꿈틀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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