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 냉혹하고 우아한 그녀의 뜨겁고도 차가운 이야기,
일상 곳곳에 내재한 폭력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은 한 여성의 이야기
「엘르」는 1982년 첫 장편 「지옥처럼 푸른」을 출간한 이후, 36년 동안 「베티 블루」(1985년)를 비롯하여 23권의 장편소설을 출간한 필립 지앙의 19번째(2012년) 장편소설이다. 소설은 “뺨이 부어오른 것 같다”로 시작된다. 필립 지앙에 따르면, 이야기나 화자가 결정되기 전에 이 문장을 쓴 뒤 숙고 끝에 화자를 여자, 즉 영화제작사 대표 미셸로 결정했다고 한다. 소설의 첫머리에 미셸은 뺨이 부어올랐고, 쓰러져 있으며, 옆에는 꽃병이 깨져 있다. 그녀는 집에 침입한 괴한에게 강간을 당했다. 복면을 쓰고 집으로 침입한 괴한은 미셸을 광폭하게 범하고 현장을 떠난다. 그런데 이상하다. 미셸은 경찰에 전화를 걸지도, 가까운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한참 만에 일어나 어수선해진 집안을 정리하고 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스시를 주문한다. 변변한 일자리가 없는 아들 벵상이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만삭의 약혼녀와 집으로 식사하러 올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녀는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행동한다. 미셸을 범한 자는 누구인가? 미셸은 왜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가? ‘그 여자’(Elle)라는 제목처럼, 독자들은 미셸이라는 범상치 않은 여인의 욕망을 들여다보게 된다.
강렬하면서도 충격적인 시작과 달리 미셸의 일상은 적어도 겉으로는 평온하다. 하지만 그녀를 둘러싼 관계와 상황은 녹록하지 않다. 재능이 결여된 채 자부심만 드높은 시나리오 작가인 전 남편 리샤르는 불가능한 시나리오를 시도 때도 없이 들이민다. 일흔다섯 살의 모친 이렌느는 미셸 또래의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 한다. 미셸과 동업자이자 절친인 안나의 남편 로베르는 미셸과의 불륜 관계를 청산할 생각이 없다. 수십 명의 아이들을 살상한 살인마 아버지는 감옥에서 임종을 앞두고 있다. 무엇보다 자신을 늘 감시하는 듯한 강간범의 위협은 현재진행형이다. 이런 생활 속에서 ‘호감남’으로 다가온 이웃집의 파트릭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발기가 되지 않는 변태다. 무엇보다 그가 바로 강간범이다.
이렇듯 필립 지앙은 미셸이, 아니 우리 시대의 여성이 얼마나 다양한 유형의 폭력에 노출된 채 살아가는지를 숨기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을 무참히 살해한 연쇄살인범 아버지, 더 이상 원하지 않는 육체적 관계를 요구하는 친구의 남편, 또 다시 새로운 남자를 바꾸어 집에 들인 어머니, 경제적 능력도 없으면서 여자 친구가 낳은 다른 남자의 아이를 키우겠다고 대드는 아들……. 작가는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폭력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그것이 삶의 일부가 되도록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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