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선화> 구소 이봉선의 한시는 대부분 그의 나이 10대 후반에서 20대까지 창작되었다. 그런데 10여 년에 걸쳐 창작된 이봉선의 한시는 매우 다채로운 변화를 보여 준다.
처음 전국적인 규모의 시사(詩社)인 신해음사(辛亥唫社)에 한시를 투고하며 작가로서의 자의식을 형성해 가던 시기, 이봉선은 자신의 창작의 방향을 식민지 현실과 이에 대한 인식을 형상화하는 것으로 설정한 듯하다. 그런데 이봉선의 창작 방향은 갑자기 변화한다. 그의 시집에서 정치적·사회적 현실을 직접적으로 묘사한 시는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대신 이봉선은 청(淸)·백(白) 등의 맑고 깨끗한 이미지를 추구하고, 자신의 생활 공간을 신선 세계로 묘사하는 시상을 전개했다.
이봉선이 한시에서 사회성, 역사성 짙은 자의식을 토로하다가 갑자기 그 시상을 감춘 것은 우선 1910년대 식민지에 드리운 검열과 통제가 큰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이봉선이 시를 발표하며 시인으로 활동했던 신해음사가 탈정치를 표방했기 때문인 듯하다.
이후 이봉선은 두 번째 남편인 김홍조(金弘祚, 1863∼1922)와의 격렬한 연정(戀情)을 시로 표현했다. 또 이봉선은 자연의 이법,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삶과 사유 등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작가 이봉선의 모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22년 김홍조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정태균의 소실이 된 이봉선은 작가의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런데 이봉선은 창작을 그만둔 지 수십 년이 흐른 뒤인 1980년, 그의 두 번째 남편 김홍조가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하이로 독립운동을 위해 떠나던 때를 회상하며, 김홍조에 대한 그리움과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 등을 격렬한 만사(輓詞)로 지었다. 이봉선이 1980년에 쓴 <추전령은 상해로 가시다>다. 이 만사에서 이봉선은 1910년대 후반에서 1920년대 초반의 독립운동을 위해 떠나는 김홍조와 그의 조력자인 자신의 모습 그리고 두 사람의 연정을 매우 사실적으로 기록했다. 여기서 한시에서 사라진 1920년대 이후의 이봉선의 의식과 행동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이봉선의 한시를 통해 그가 김홍조와 정태균의 소실로서 각각 어떠한 삶을 살았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봉선이 남긴 두 편의 산문을 통해 그가 30대 이후에 식민지 시대를 거쳐 근현대를 어떻게 살아갔는지, 기생 출신 소실의 삶과 문학 환경은 어떠한 상관관계를 가지는지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신분제가 철폐된 뒤에도 기생 출신은 신분에 대한 관습적 인식을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기생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은 제도가 철폐되어도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었던 것이다. 이봉선과 김홍조의 관계 그리고 정태균의 관계는 관기 제도가 철폐된 뒤에도 여전히 가족의 경계 주변에 머물렀던 기생 출신 시인들의 삶의 행로를 잘 보여 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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