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 시선> 주자는 일생 동안 강학과 저술에 온 힘을 바쳤지만, 어려서부터 시 짓기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호와 정이의 이학을 신봉하기 시작하면서 ‘언지서정(言志抒情)’을 위주로 하는 시 창작에 대해 심리적 갈등을 많이 겪었다. 특히 주돈이가 주창한 ‘문이재도(文以載道)’라는 글의 역할과 정이의 ‘작문해도(作文害道: 글을 짓는 것은 도를 해치는 것이다)’라는 극단적 견해로 인해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러나 수려한 산수 경물을 보면 감정이 동하고 시흥(詩興)이 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는 가학(家學)과 사승(師承)의 관계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의 부친인 주송은 당시 작시와 시학에 능한 유학자로 ≪위재집(韋齋集)≫을 세상에 내놓았으며, 천주(泉州)태수인 사극가(謝克家)가 주송의 시재를 높이 평가해 이름을 떨쳤다. 또한 주자의 청소년 시절 스승이었던 유자휘도 유학자이자 유명한 시인이었다. 그리하여 주자는 어려서부터 유학자로서뿐만 아니라 시인으로서도 자질을 키웠다. 남송 효종이 융흥(隆興) 연간(1163∼1164)에 공부시랑(工部侍郞) 호전(胡銓)에게 훌륭한 시인을 물색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이에 1170년 말에 올린 상소문에 주자를 비롯한 15명의 명단을 올렸다. 이때 주자의 나이 41세였다. 또한 주자는 28세에 ≪목재정고(牧齋淨稿)≫라는 시집을 편찬했고, 이후 계속해서 10여 권의 시집을 냈다. ≪주문공문집≫을 보면, 앞 10권에 모두 1210수의 시사(詩詞)를 수록했고, 별집과 유집에도 187수의 시를 수록했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전송시≫에도 약 90수가 있으니, 도합 1487수가 된다(장세후 옮김, ≪주자시 100선≫ 6쪽).
주자의 시가 중에 가장 많은 시는 산수시다. 그는 일생의 대부분을 정사와 서원에서 강학과 저술에 힘썼다. 그의 정사와 서원은 모두 수려한 산수 자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는 천성적으로 산수를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강학과 저술로 일관된 무미건조한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운 활력과 리듬을 찾고자 명승지를 탐방하고 승경을 감상하며 풍물을 노래했다. 물론 길지 않은 관직 생활을 하면서도 여러 곳에 유람의 족적을 남겼다. 그는 언제나 이학가의 본분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애를 많이 썼다. ‘음풍농월(吟風弄月)’이라고 하는 자체가 유학자의 신분과는 배치되기 때문에 스스로 경각심을 야기해 수시로 반성과 사변을 통해 극복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천성적인 산수 사랑과 풍부한 시정, 그리고 탁월한 시작 능력이 때로는 그의 이성적 사변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학도(學道)’와 ‘음시(吟詩)’의 절충을 모색했는데, ‘공문시교(孔門詩敎: 공자 문하의 시 교육)’를 근거로 시작의 당위성을 내세웠고, 음풍농월의 행위 또한 이학가들에게 활력과 심리적 안정을 위해 꼭 필요한 대사 작용이라고 스스로 간주했다. 더욱이 천지 만물에 이(理)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산수를 관조하고 산수미를 파악하는 것은 천리(天理)를 깨우치려 하는 것으로, 이학가가 내세우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주장과도 상응하는 것이라 여겼다. 따라서 ‘음풍농월’하는 것은 산수 자연으로부터 각 경물이 지니고 있는 존재 이유와 우주 만물의 섭리를 깨우치는 데 일말의 효용이 있다고 보았다. 또한 그의 산수시에는 남성적인 강건함과 호방하고 웅대한 풍격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개인적인 기질과도 관련이 있지만 이학 사상의 심미관을 그대로 반영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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