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백작저에 갇힌 비참한 노예일 뿐이었다.
무장한 기사들과 빨간 혀를 날름거리는 화염이 주인의 저택을 둘러싼 그 날.
“어디 가. 너는 이리로 와야지.”
사내의 나긋한 목소리가, 그녀를 붙들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렇게 ‘케드릭 크롬웰’은 바네사에게 있어서 구원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결코 만나서는 안 되는 운명이었다.
결국, 그녀는 남자에게 가장 큰 상처를 남긴 채 그의 곁을 떠났으니까.
그러나 몇 년 후.
“뻔뻔하게, 내 아이를 가지고 도망갈 생각을 다 했어.”
도망간 바네사의 앞에 다시금 그가 나타났다.
“네가 누구의 핏줄이건 나한테 그런 건 하등 중요치 않아.”
역적의 후손이건, 도적의 딸이건, 설령 가족을 죽인 원수 놈의 딸이라고 한들 그런 것이 무슨 상관일까.
“중요한 건, 아직도 내 이름이 여기에 새겨져 있다는 거지.”
바네사의 어깨로 고개를 가까이 묻은 사내가, 마치 짐승의 것처럼 그르렁거리는 음색으로 말했다.
그의 커다란 손은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주인의 의지를 대변하는 듯, 바네사의 하얀 어깨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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