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양

희생양 완결

범가의 절대적인 부와 권력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수인의 세계.
일개 애완견보다도 천하게 취급받는 양족 출신의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어쩌면 ‘희생양’뿐이었다.
누군가의 업보와 액운을 대신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
세상이 그렇게 정해 놓은 양족의 운명은 지금껏 그 누구도 바꿀 생각조차 하지 않은, 엄격하게 정해진 질서였다.

-모르긴 몰라도 이영 씨 가족들만큼은 먹고사는 데 지장 없을 거예요. 양족에겐 흔치 않은 제안이니 현명하게 이득을 따져 봐요.
이영 씨만 희생하면, 평생 가족에 대한 걱정만큼은 덜 수 있지 않겠어요?
-가긴 어딜 가니! 너 미쳤어? 네 엄마가 희생양 짓을 하다가…… 그러다 몸을 더럽히고 죽은 걸 몰라서 그래?
돈이 무슨 소용이야. 나가서 뭘 어쩌겠다고! 어미 죽은 거 봐놓고도 그걸 하겠다는 소리가 나와?

할머니는 엄마처럼 자신이 나락에 빠질까 걱정해 부득불 말렸지만 이영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자신이 짊어져야 할 가족의 무게가 너무도 무거웠기에.
엄마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보호막도 없이 세상 밖으로 나가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영은 때마침 찾아온 여우족의 금지옥엽 호을의 ‘희생양’이 되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할머니. 난 엄마처럼 되지 않을 거야. 내 비밀을 지킬 수 있어. 아무도 모르게 할게. 할 수 있어.

작은 얼굴에 큰 키. 늘씬한 몸매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충분히 어여쁘다는 말이 어울렸을 이영은 그렇게 스스로 자신의 보드랍고 풍만한 여체를 감추고, 머리를 짧게 자르고 세상에 나왔다.

-넌 내 부적이니까. 네가 곁에 있으면 괜찮아. 날 구해 줄 거지?

철저히 타인을 위해 살아가는 삶 속에서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중요한 존재로 인정 받았다는 기쁨을 느낄 즈음.
호을을 따라 지내게 된 엘리트 메이트 비즈니스 스쿨에서 그녀는 자신의 이성을 갉아먹는 지독한 상대를 만나고 만다.

“버릇이 없네. 윗사람을 만났으면 정중하게 인사부터 해야지. 이렇게 토끼시겠다, 이건 누가 가르친 개 매너야?”

범가의 유일한 후계자. 타고나길 지배자로 태어났다는 그는 어째서인지 처음부터 자신에게 가장 가혹하고 잔인했다.
다른 이와 같이 양족을 혐오하는 것 같다가도, 오롯이 자신에게만 세워진 것 같기도 한 분노의 칼날에 이영은 속절없이 지배되기 시작한다.
가장 고통스러운 건, 그 지배의 끝은 늘 생애 처음 겪는 쾌락이라는 것.

“너는 남자였어도, 여자였어도, 양족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내 밑에서 굴렀어야 해. 하지만 꽤 나쁘지 않잖아? 네 그 비루한 몸뚱어리를 이렇게나 예뻐해 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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