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실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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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 나의 린.’돌이켜보면 이 여인은 제게 늘 그랬다. 초하의 무르익은 과실인 양 달콤한 듯했다가, 설산의 삭풍처럼 싸늘하고 혹독했다. 자신은 린의 앞에서 한결같이 순종적인 개였다.정작 단 한 번도 목줄이 잡힌 적도 없는데 그리도 멍청하게도, 제발 제 목줄을 끌어 달라고 안달하며 꼬리를 흔들어 대는 미련스러운 개.-지금의 강왕께서 대체 무얼 하실 수 있습니까?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반문 앞에 그의 표정이 처참하게 무너졌다. 붉어진 눈으로 하염없이 바라만 볼 것만 같던 그가 빗물에 허물어져 내리는 토우(土偶)처럼 털벅, 무릎을 꿇었다.-린, 제발…….그 애절한 이름에 동요하는 대신, 설린은 차갑게 조소를 머금었다.-아, 그런 건가요. 설마, 나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옛 추억에 기대어 어리석은 아해들처럼 몰래 야반도주라도 해주길 원하시는 겁니까? 그래서 그 이후에는요?한유검은, 그리고 설린 저는, 이름도 성씨도 없는 필부가 아니다. 그렇기에 당장의 이기적인 욕심으로 도피하면, 그 대가가 한두 사람의 목숨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그렇게 도망친 앞날에 도원경같이 낙원이 펼쳐질 것 같으십니까?어린 시절 헤어졌던 어느 낭자와 도령이 다시 만나 다복하게 백년해로했다는 이야기는 아해들이 좋아하는 구전설화에나 나오는 것이다. 현실이란, 설화처럼 달콤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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