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쳤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곳으로.
모든 걸 버리고 한 자락조차 남기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일상을 파고든 남자가 은재의 과거를 끄집어낸다.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네. 해주에서의 기억은 전부 다 잊어버렸어요.”
처음 만난 게 분명할 남자가, 자신을 알 리 없는 남자가
자꾸만 잔잔한 수면을 요동치게 만든다.
“저한테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어요.”
“친구 하고 싶어요, 연은재 씨랑.”
지웠다고 생각한 기억의 조각을 소중하게 건네며 지수혁은 그저 웃었다.
흔들리는 수면이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음을 알려 주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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