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는 쓰고 죽음은 달다 [BL][단행본]

인내는 쓰고 죽음은 달다

죽은 애인을 따라 옥상에서 뛰어 내렸더니 모르는 곳, 모르는 세계. 그곳에서 다시 만난 네게 나는 이번에야말로 후회 없이 모든 사랑을 바치리라 결심했다. 설령, 네가 피에 미친 폭군이라고 하더라도.
*
잠시 후, 조용한 방 안에 끼익하며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운이 고개를 들자 제파르는 조심스럽게 침대로 다가갔다. 바싹 메마른 얼굴을 하고서는 제게로 손을 뻗는 모습이 가엾다. 마치 빨려들 것만 같은 늪이다. 이것은.
……감히 이 손을 뿌리칠 수 있을 리가. 제파르는 허망하게도 그 팔에 조용히 안기고 말았다. 그제야 안심한 듯, 굳어 있던 어깨가 조금 느슨해졌다.
오로지 제게만 향하는 시선을 보며 제파르는 실로 체감하고야 말았다. 아아, 당신이 내게로 뻗는 그 팔을 차마 떨쳐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렇게나 갈구해 버리고 마는데…….
“일어났어?”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정작 그에게 착취당하는 것은 자신임에도 누가 본다면 제가 그를 핍박하는 것처럼 보일 듯한 모습이다. 제파르는 애써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달고 간신히 인사를 건넸다.
최대한 비슷하게.
누군가의 모방품. 누군가의 대용품.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도 없는 비참함을 애써 감춘 채로 건네는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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