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자리에 있으라고 했지, 그렇게 다 벗고 덤비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이바노프 공국의 가장 고귀한 공녀, 나타샤 이바노프의 세상은 종말을 맞았다.
그 순간 무너진 잔해를 헤치고 나타난 이는, 그녀의 구원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세상 그 누구보다 그녀를 가장 경멸하는,
그녀의 파멸을 누구보다 바라고 있을 지옥의 사신이었다.
정말로, 그가 살아 돌아왔다.
알렉세이 페트로프.
이바노프 공국에서 가장 천대받던 크눌루 출신의 노예.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실력과 미모를 갖춘 검투사.
그는 피로 물든 금빛 왕좌를 짓밟고 올라 새로운 시대의 왕이 되었다.
* * *
“그렇게도 살고 싶은가? 이 모든 것을 앗아 간 내가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울 텐데도. ……멸시하는 자의 정부가 될 정도로.”
어깨를 내리고 바들바들 떨고 있던 나타샤가, 문득 고개를 들어 말했다.
“……멸시하지 않습니다.”
“거짓말. 속으로는 천하다고 비웃고 있을 텐데…….”
“아니요. 세상에 천한 사람이란 없습니다.”
알렉세이는 눈을 꽉 감았다. 가슴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번지르르한 말만으로는 무슨 얘기든 못 할까. 진정 나를 멸시하지도 천하게 여기지도 않는다면 나의 키스 또한 피하지 않을 테지.”
저 고아하고 맑은 눈동자에 어린 것은 무엇일까.
체념일까, 슬픔일까, 혹은…… 경멸일까.
더는 보고 싶지 않아 알렉세이는 그녀의 입술에 거칠게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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