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이었던 남자와 동시에 빙의했다.
나는 풍족한 가르시아 공작가의 메르엔 가르시아로, 애인은 빚을 잔뜩 진 비셀 자작가의 카일 비셀로.
저쪽 세계에서 5년, 이쪽 세계에서 5년. 도합 10년의 연애. 끝은 1년치 영지 생활비를 빌려달라는 그에 의해 산산히 부서졌다.
***
“아무리 그래도 같이 지낸 정이 있는데 홀랑 다른 놈에게 한눈 파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 넌 돌아갈 생각이 없어? 아, 그래. 무려 황태자가 주변에 껄떡거리는데, 전보다야 백 배 천 배는 나은 삶이지. 안 그래? 어?”
카일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전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나를 후벼 팠다.
"누가 보면 네가 메르엔 가르시아인 줄 알겠어?"
손에 쥘 수 없다면 자신이 있는 진창까지 끌어내리겠단 각오가 카일의 두 눈에 가득했다.
안다. 카일이 말하는 황태자, 제라르 벨무트의 소꿉친구는 내가 아닌, 원래의 메르엔이라는 거.
아는데도.
'관계는 다시 쌓아나가면 돼, 괜찮아.'
5년 전, 기억을 잃었다는 내 말에 개의치 않다는 듯 처음부터 다시 쌓아나가면 된다고 말해주었던 소꿉친구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밀어내기엔, 이미 늦어 버렸으니까.
-
"약혼을... 무르고 싶어."
내 말에 제라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네 말대로 추억을 다시 쌓는다면 나중에 해도..."
"메르엔."
부드럽게 내 말을 끊은 제라르가 단호한 표정으로 나를 직시했다.
"난 너와 친구로서 관계를 다시 쌓고 싶은 게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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