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능을 가진 태자궁의 궁녀, 은월.
전쟁터에서 살육을 일삼다가 끝내 미치광이가 되어 스스로 뱃가죽을 가른다던 왕자, 진 휼.
“왜, 벌써 도망갈 생각이라도 드는 것이냐.”
고개를 기울이며 얼굴을 살피던 남자가 긴 숨을 소멸하듯 뱉으며 물었다.
우묵하게 그늘이 진 눈매가 독촉하자, 달달 떨리는 손을 끌어모은 은월이 간신히 힘을 내어 대답했다.
“이리 뵙고 또 뵙다 보면 소인을 보는 눈길이 지금보다는 아주, 조금 더, 따스해지길 바랄 뿐입니다.”
긴장감을 삼킨 은월이 시선을 들어 감히 주인을 바라보았다.
참 여러모로 숨이 막히는 얼굴이었다.
차라리 저 흰 피부에 담긴 모든 이목구비가 하나 같이 못생기기라도 하면 좀 나았을 것을.
미색에 가까운 외모가 살기를 머금고 있으니 괜히 보는 이만 이질적인 두려움이 엄습할 지경이었다.
“하여 어떻게든 네 역을 감당하겠다?”
“……기회를 주십시오, 저하.”
기이한 탄식을 늘어놓으면서도 나른하게 내려다보는 눈동자에 은월의 얼굴이 내려앉았다.
“너는 뭐든 늦게 아는 모양이로구나.”
은월의 새까만 눈동자가 또르르 굴러 제게로 닿자, 그의 눈가가 나붓하게 접혔다.
“그간 네가 태자의 잠자리를 거들어 줬다지? 그럼, 오늘부터는 나를 재워 줘야겠구나.”
본시 위태로운 사랑, 예측할 수 없는 운명,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곳에서 피어나는 시작이 가장 위험하고도 뜨거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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