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인 모를 마력 폭풍과 변이체에 의해 세상이 붕괴하고, 초능력자로 각성한 소수의 인간들이 쉘터(Shelter)를 만들어 살아가는 아포칼립스 소설에 빙의했다.
주인공 ‘유진’의 여동생을 인질 삼아 유진을 죽음으로 내몰다 살해당하는 악역, ‘백은성’에.
원작의 백은성은 모든 인간을 증오하는 듯 패악을 부리고 손에 피를 묻히는 일조차 주저하지 않는 악인이었다.
하지만 나는 백은성이 아니었으니, 그와 나는 다르다고 몇 번이나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러나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와 뼈가 씹히는 소리에 시원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은 것처럼 후련해지며, 언제나 나를 괴롭히던 끔찍한 ‘광증’이 가라앉는 걸 느낀 순간.
그때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원작의 백은성이 살인을 주저하지 않은 이유를.
인간을 사랑할 수 없는 백은성에 빙의한 이후, 나 역시도 광증에서 벗어날 수 없는 법이었다.
그러다 마주한, 광증마저 자취를 감추게 만드는 유진의 존재는 내게 있어 유일한 구명줄이었다.
그가 있어야만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면, 그를 맘껏 이용할 수 있기를 바랐다.
내가 원하는 형태로, 언제든.
“말 잘 듣는 개처럼 구는 게 좋을 거야. 나는 인내하는 법을 잊은 지 오래거든.”
나는 무슨 짓을 하더라도 유진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창놈처럼 구는 게 취미인가?”
“뭐?”
“저런 애들이랑 해서 느낌이나 나겠어? 그리 원하면 내가 해결해 줄게.”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관계가 처음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
“혹시 아픈 곳이 있나?”
“없다니까.”
“그게 아니라… 지병 같은…”
유진은 말하면서도 확신이 없는 눈치였다. 잔병치레도 없는 이능력자에게 지병이 있을 리가 없다는 걸 유진이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유진이 무언가를 알고 묻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손에 쥐고 있던 젓가락을 괜히 만지작거리던 유진이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말을 이었다.
“…연이가 처음 널 봤을 때 아파 보인다고 했었어. 그래서 처음엔 드러나지 않는 부상이라도 입은 줄 알았지.”
지병이나 잔병치레는 없어도 내상을 입을 순 있다. 이능력자들에게 내상은 외상만큼이나 흔한 것이었으니. 하지만 유연이 아픈 것 같다고 한 이유가 내상을 이야기한 건 아니었으리라.
“그런데 지금은…”
잠시 말끝을 흐렸던 유진이 오랜 고민 끝에 덧붙였다.
“내 눈에도 네가 아파 보여.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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