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시대와 새로운 시대가 씨줄과 날줄처럼 교차하는 1920년대 뉴욕, 태양신 아폴론처럼 눈부신 남자가 사교계에 등장한다.
칼라일 드 로슈레 남작의 과거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고, 무성한 루머와 스캔들만 그림자처럼 그의 뒤를 따른다.
메이벨 달링턴에게는 ‘올해의 데뷔탕트’라는 화려한 타이틀보다 대학 공부가 더 중요하다. 이는 셸 쇼크(Shell Shock)로 사망한 사촌 오라버니와의 약속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메이벨은 숙부 내외의 빚으로 인해 원치 않는 정략결혼에 내몰리게 되고, 그 상대가 로슈레 남작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그는 그녀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데다 여자관계도 복잡했고, 무엇보다 그녀에게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남작이 자신과 결혼하려는 이유가 ‘올해의 데뷔탕트’라는 평판을 방패 삼아 부정적인 루머를 덮으려는 속셈이라 판단한 메이벨은 되바라진 플래퍼의 모습으로 칼라일 앞에 나타난다.
“새로운 모습이 잘 어울리는군요.”
메이벨은 어깨를 움찔했다. 잘못 들은 걸까.
“바, 방금 뭐라고…?”
칼라일이 다시 한번 그녀의 모습을 훑었다.
“혹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면 약혼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그녀의 뺨에 뜨끈한 열기가 몰려들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칼라일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다 큰 줄 알았는데, 아직 멀었군.”
그가 하얀 포켓치프를 꺼내며 그녀의 턱을 쥐고 들어 올렸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드무아젤 달링턴, 자신을 과소평가하신 듯합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칼라일이 입술의 립스틱을 닦아내는 동안, 메이벨은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차가운 실크에 감싸인 단단한 손가락이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스쳤다. 간질거리는 감각에 손끝이 저릿해졌다.
붉게 얼룩진 포켓치프를 다시 가슴에 꽂은 그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실례.”
칼라일은 낭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태도로 메이벨의 왼손을 들어 올려 반지를 끼웠다.
“사랑 없는 결혼을 하면, 저와 남작님 둘 다 평생 불행하지 않을까요?”
그는 가볍게 코웃음 쳤다.
“사랑 같은 건, 나 말고 다음 남편에게 요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실체가 없는 그림자처럼 느껴지는 남자의 세계에 발을 들인 메이벨.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을 것인가, 아니면 그림자 너머에 숨은 빛을 찾아낼 것인가.
※ 작중에 등장하는 인물, 회사, 단체 및 사건은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창작된 허구로, 실제와는 무관합니다.
※ 실존 인물이 등장하는 에피소드 또한 역사적 사실과는 관련이 없는 작가의 창작입니다.
※ 본 작품은 시대적 분위기와 표현의 맛을 살리기 위해 일부 외래어를 관용적인 표기로 사용하였습니다.
일러스트: 감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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