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필요하다면 그냥 날 안아요. 어차피 난 여자로 못 살아요. 그러니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요. 내가 온전히 여자로 살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라고 생각해 줘요.”나지막한 레미의 속삭임에 리산더가 낮게 신음했다. 폭주하는 힘을 이기지 못한 청록색 눈동자가 제 색을 잃고 붉게 물들었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힘겹게 이성의 끈을 부여잡았다.하지만 그런 노력은 오래가지 못했다.“사실은 그 모든 걸 떠나 그냥 당신이 좋아요.”덧붙여지는 말에 이성이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지금부터 제가 여동생의 역할을 대신할 생각입니다. 혹 거부감이 드신다면 목숨으로 용서를 구하겠습니다.”레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리산더가 실소를 토해냈다. “목숨이라……. 장자로서 동생의 죄를 대신 받겠다는 건가? 좋다. 그럼 어디 한번 해 보지.”리산더가 들고 있던 검을 그녀의 앞으로 던졌다. 가면에 가려진 그의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망설임 없이 칼을 손에 든 그녀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여자로 태어났으나 남자로 살아야 했던 지난날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가는 날이 좋아서, 남길 말이 없어서 다행이다. 레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내려앉았다.눈부시게 반짝이는 검이 서서히 레미의 심장으로 향했다. ‘심장을 한 번에.’ 만에 하나 모든 걸 버려야 하는 순간이 오면 그렇게 하라던 어머니의 말을 떠올리며 질끈 눈을 감은 레미가 손에 힘을 줬다.하지만 그녀의 시도는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목숨을 함부로 하지 마라. 네가 이런다고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것 같은가? 개죽음일 뿐이다.”리산더의 시린 청록색 눈동자가 붉은빛을 띠며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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