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 후진에서 [단행본]

그해 여름 후진에서

나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거리는 무서움과 함께 가슴밑바닥에 잔잔히 깔리는 깊은 연민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가 없다. 긴 머리를 뒤로 묶고 나뭇잎이 그려진 가운을 걸친 채 우울한 눈빛으로 담배를 태우던 그 여자. 하얀 이마와 콧날 선으로 이어지는 앙다문 그 입술의 붉은 빛깔을 생각하면 지난 여름의 해변에서 벌어진 일들이 마치 한 토막의 스크린처럼 머릿속을 점령해 버린다. 나는 그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기 보다는배우고 느낀 점이 더 많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랑은 양심의 눈을근시안으로 만들고, 승부는 포기에서 오며, 이 세상에는 참으로 절묘한 우연들이 귀신들처럼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그 사건은 바로 해변에서 시작되었다. 오후 늦게 하늘이 잔뜩 찌푸리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바람을 몰고은 비는 파도를 키보다 높이 끌어올려 연신 해안에 몸을 부볐다. 우리는 텐트 속으로 기어들어가 모두들 누에처럼 몸을 웅크렸다. 먹구름과 비와 파도의 난장판은 해변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동해안의 후진 해수욕장에 도착해서 텐트를 치고 수영복을 갈아입고 바다로 나가려는 순간 일어난 기상변화였다. "어차피 오늘은 물 속에 못 들어갈 것 같군." "이만저만한 광란이 아니야." 우리들은 텐트 속에 쪼그리고 앉아서 속수무책이었다. 두 사람은 낮잠을 청했고, 민우는 무릎 위에 턱을 댄 채 휘파람을 불고 있었으며, 나는 그가끊어질 듯 이어질 듯 불고 있는 '이마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무심히 듣고있었다. 민우는 나와 의과대학 4학년 동기였고, 두 친구 중 하나는 신과대학, 하나는 문과였다. 우리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단짝들로, 여름이면 어김없이 캠핑을 동반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번이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우리들은 이제 각기 군대 가거나 유학 가거나 취직을 하게 되어 내년부터는 캠핑 동반자가 되기 힘들게 된다. 어두워지자 비는 개었지만 바람은 거세게 불었고, 파도는 여전히 높았다. 해변의 여기저기서 텐트가 넘어지고 바람에 날리는 소동이 벌어졌다. 겨우겨우 라면으로 저녁을 때우고 텐트 안에 들어앉아 라디오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일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민우가 제일 먼저 의과대학 해부학 실험실에서 일어난 무서운 얘기 하나를 꺼내자 화제는 자연히 귀신 얘기로 모아졌다. 밤중에 해부실로 들어갔더니 시험관 안에 든 팔이 손가락을 흔들며 가까이 오라는 시늉을 하더라는 얘기는 언제 들어도 뒷머리털이 곤두섰다. 같은 얘기지만 시간과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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