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물러나고, 서서히 숲 너머의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간이 지고, 그의 시간이 밝아온다. 후천적 주맹증을 앓는 알리시아 W 에밀헤임. 무채색으로 이루어진 그녀의 세상을 다채롭게 물들이기 시작한 르한 아브 에스트리센. 그가 자신을 이용한다는 걸 알면서도 기꺼이 이용당해 주었다. 그는 주저하지 않았고, 그녀 역시 망설임 없이 내어주었다. 그에게 그녀는 수단이었고, 그녀에게 그는 목적이었을 뿐. 그래서 안도했고, 방심했으며, 아름다움에 질식하는 것도 모른 채 빠져들었다. 더는 그녀의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 르한은 숲으로 뛰어들어갔다. 파편처럼 산산이 부서져 흩날리는 유리의 숲으로. 일러스트 _ 델타
세크라디온 왕국의 붉은 장미, 다프네 뷰캐터. 그녀가 이 세계에서 가지지 못하는 것이란 없다.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것은 없으니까. 이를 테면……. “셀레스티안 테리오사를 제게 주세요.” 대륙 최고의 검사, 왕국 최고의 미남 왕자, 유령 섬을 가진 대공. 오점? 여주를 쟁취하기 위해 반역을 저지르다 엔딩에서 뒈지는 악역이라는 것. “저 반역자, 제게 파시라고요.”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상관? 여기는 소설 속이고 다프네가 가진 건 돈뿐인데. 버려진 최애, 돈으로 구원할게. 서브남이 빙의한 악녀따윈 사랑할 리 없으니, 다프네는 그를 실컷 골려먹다 단물이 빠지면 가차없이 버릴 예정이었다. 그러니까, 정말 그럴 예정이었는데……. * “뷰캐터.” 그는 문고리를 쥐고 있던 손을 놓고 다프네의 젖은 머리칼을 한 줌 감아쥐었다. “나와 함께 자.” 다프네는 눈을 느릿하게 끔뻑거렸다. 얕은 불을 등진 셀레스티안은 허리를 숙여, 경직되어 있는 그녀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그대도 그러고 싶잖아.” 왕자님, 잠시만. 좀 진정해 보실래요? Illust by. SUKJ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