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장에 버려진 여자. 그녀를 주운 건 해강물산의 미친개, 주태강이었다. “안현서, 한국대 미술학과 2학년.” “…….” “아빠 닮았네, 현서 씨는.” 태강은 오래 전. 제게 무릎 꿇고 빌던 운전기사를 떠올렸다. “5억.” “…….” “현서 씨 부친께서 받아간 5년 치 연봉이야.” “…….” “그 연봉에 추후 일정에 대한 상여금까지 미리 계산해서 3억. 여태까지 일한 정을 생각해서 개인 신용으로 2억까지.” 그러면 순식간에. “10억이 됐네.” 그가 느긋하게 웃었다. 현서가 떨리는 손으로 물었다. [제가 뭘 하면 되나요?] “현서 씨. 영화 좋아해?” ……영화? 눈치를 살피던 현서가 서둘러 고갤 끄덕였다. “그럼 알겠네.” 빚쟁이들이 자주 하는 대사. “돈이 없으면.” 몸으로라도 때워야지.
※ 본 작품에는 가정 폭력 관련 소재 및 장면이 포함되어 있으니 구매 및 감상에 참고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졸업은 해야죠. 누가 말했더라? 저였는지 서은성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발언자가 누구건 간에 탐탁잖아하는 양가 부모님들 앞에서 장시은은 생각했다. 그래, 졸업은 해야지. 죽을 둥 살 둥 한 건 아니라도 남들 하는 만큼은 애쓰고 고생해 들어간 대학이었다. 유급할 생각도, 재주도 없으니 졸업해도 기껏해야 스물넷, 만으로 스물셋이었다. 그 정도 자유는 누려도 될 거라고 생각했다. 대단한 일탈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공부에 대한 꿈을 펼쳐 박사가 되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들어간 대학, 졸업 정도는 하고 싶다는 거였다. “저희 파혼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자가 따로 있어요.” 서은성의 한마디에 6년 간 노력해 왔던 결혼이 깨졌다. “차라리 잘 됐다. 고작 진광 따위의 졸부 집안에 너 주기 아까웠어.” 진광 따위라니. 진광의 돈을 그렇게 받아놓고 고작 졸부 집안이라고 헐뜯은 장명환의 눈이 어둡게 빛났다. “내 주임 검사 새끼가 젊은데 집안이 아주 좋아.” 장명환의 선거법 위반을 수사하고 있는 주임 검사라면 아마…. “계 검사? 유부남이지 않나요?” “그 새끼 말고. 그 새끼한테 동생이 있어. 경찰 쪽에.” “동생? 설마, 계무결이요?” 시은도 아는 이름이었다. “그 사람… 전 부인을 패 죽였다는 그 경찰 아니에요?” 그래, 계무결은 보통 그렇게 알려진 인물이었다. 부인을 때려죽인 경찰 간부. 혼인신고를 하기 전이었다니 따지자면 부인이 아니고 애인이겠지만, 여하튼. “지금… 저보고 그 사람과 결혼하라고요?” 일러스트: 진사
나는 피부가 맞닿은 사람의 기억과 감정을 읽는다. 아니, 본다. 아니, 읽고 보고 듣고 느낀다.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그냥 감응한다. 그건 내게 매우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감응하는 순간 찾아오는 발작과 기절, 쏟아져 들어오는 상대의 기억과 감정, 그리고 폭로의 위험성. 그래서 나는 항상 조심한다. 누구와도 닿지 않게. 아무와도 필요 이상으로 엮이지 않게. 그러던 중, 그 사람을 만났다. “나한테 원하는 게 정확히 뭐야?” “금전적인 거든, 신체적인 거든, 보다 직접적이고 확실한 걸 요구해.” 내 능력이 전혀 통하지 않는 사람. 피부가 닿아도 괜찮은 사람. “……선배의 시간이요.” 나를 정말로 싫어하는, “제일 질 나쁜 도둑이네…….” 나의 구원자. 표지 일러스트: DARI
‘당장 그 할망구 집으로 튀어가! 거기 답이 있어! 거기에 네년이 모셔야 하는 나무도, 귀인도… 어라? 가만 보자…… 지금 보니 거기, 악연도 있네?’ 보이지 말아야 할 존재들을 몇 번이나 마주한 끝에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가 들은 말이었다. “뭡니까?” 그러나 그곳에서 마주한 건, 이제 막 화보를 찢고 나온 듯한 미형의 남자였는데. “그쪽이야말로 누구시죠? 어떻게 여기 계시는 건가요?” “내가 뭐든, 남의 집 대문 함부로 따고 들어온 좀도둑보단 나을 것 같은데.” “좀… 도둑이요? 이것 보세요 선생님. 저는 좀도둑이 아니라.” “아니면 뭐, 지망생?” 잠깐의 대화조차 일반적이지 않은 남자는 사회 부적응자가 분명했다. 하지만 되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느껴지지 않으세요? 지금 선생님 어깨 위에 웬 여자가 울고 있어요. 짚이는 일 없으세요? 그거, 제가 퇴치해 드릴게요.” 물론 이 새빨간 거짓말로 인해 벌어질 일들은 생각지 못한 채였다. *** “내… 내 거… 내 거야…….” “이거 완전 맛탱이가 갔네.” 어떻게든 버티려는 꼴이 우스워 판을 깔아 줬건만, 색귀 하나를 접신해서는 벌이는 짓거리에 헛웃음이 터졌다. “후… 꼬마야, 어디서 이렇게 퇴마하래.” 아롱거리는 불빛 너머로 하얀 얼굴이 보였다. 감히 염장을 질러 놓고 안온해 보이는 표정에 천불이 일었다. “남의 몸에 불 질러 놓고 지금, 잠이 오지?” 수백 년의 침묵을 깬 톱니바퀴가 요란한 궤적을 그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본 작품은 리디 웹소설에서 동일한 작품명으로 15세이용가와 19세이용가로 동시 서비스됩니다. 연령가에 따라 일부 장면 및 스토리 전개가 상이할 수 있으니, 연령가를 선택 후 이용해 주시길 바랍니다. <한나야, 만약 내가 죽으면 네가 내 이름으로 살아.> 죽음의 그림자가 턱밑까지 차오른 절체절명의 순간, 친구 예지가 건넨 가방 속엔 차디찬 유언만이 덩그러니 담겨 있었다. <아, 여유 되면 우리 오빠한테 나 죽었다고 그 말은 좀 해 주라.> 한나는 무거운 족쇄를 차고 연고 없는 부산으로 향했다. 그녀의 오빠를 찾아가 죽음을 고하기 위해. 하지만 그곳에서 마주한 남자는, 지옥보다 뜨겁고, 뱀보다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쫓기는 곳이 어디든 내한테 붙으란 소리다. 적의 적은 동지 아이가.” 한순간 죽은 사람이 되었고, 이제는 내가 존재해도 되는지조차 알 수 없는 현실. 한나로 살고 싶긴 한 건지, 아니면 그저 도망치고 싶었던 건지.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만큼 버거워진 삶의 무게가 기어이 그녀를 짓눌렀다. 그의 곁에 머물수록 한나는 위험한 갈망에 젖어 들었다. 죽은 친구의 이름 뒤에 숨어, 이 남자의 곁에 있고 싶다는 끔찍하고도 나쁜 마음이. *** “니 서예지 알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한나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니 진짜 이름이 뭐고.” “제가 다 잘못했어요, 아저씨…….” 심장을 꿰뚫는 듯한 의심 앞에서, 그녀가 애써 숨겨 온 진실은 차갑게 얼어붙어 바스라졌다. “니 도대체 누구냐고, 씨발!” 진실을 마주한 순간, 거짓으로 쌓아 올린 위태로운 관계는 걷잡을 수 없는 파멸을 향해 폭주하기 시작했다. [표지 일러스트: 메이비진]
란테는 학살자 게비몬드의 아내 따위 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고향을 파괴하고 양어머니와 이웃들까지 몰살시킨 미치광이 왕의 아내 따위 되고 싶지 않았다. 살아남았지만, 화려한 보석과 드레스에 감싸인 채 인형처럼 살아가는 삶은 행복이 아니었다. 평화로운 숲속 마을에서 캐 먹던 풀뿌리와 딱딱한 빵이 그리웠다. 돌아가고 싶었다. 벗어나고 싶었다.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천사여.” 믿음 없는 기도로라도. “그대가 수호하는 낙원의 딸이 부르노라.” 뭔가를 불러낸 그녀는 천사인지 괴물인지 알 수 없는 존재의 팔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비고?” 어찌 된 일인지 10년 전에 행방불명되었던 소년이 장성한 사내가 되어 그녀를 구했다고 한다. 사악한 마녀에게 잡혀가는 걸 봤다는 꼬마들의 증언이 생생했는데. “너 정말 비고야…?” 분명히 그 아이였다. 그녀가 제일 좋아했던 소꿉친구. 작고 사랑스러웠던 꼬마 친구. “감사 인사는 네 약혼자한테 해. 널 구해줘서 고맙다고 내게 2만 크로네를 주겠다더라.” 하지만 그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크고 강인한 몸으로 자라 있었고, 대 영지의 성주라는 높은 지위도 가졌다, 그리고. “그자는 내 약혼자가 아니야! 내 어머니를 죽이고 우리 고향을 파괴한 미치광이란 말이야!” “그게 뭐?” 차가워진 눈빛과 말투. “그자가 죽인 건 ‘남의 어머니’였을 뿐이지, 그가 자기 가족을 죽인 말종은 아니잖아? 자기 여자한텐 잘한다던데. 그 정도면 괜찮은 신랑감이야.” 비고는 겉모습뿐 아니라 내면까지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뀐 것 같았다. “살인자라 싫어? 깨끗한 남자를 찾고 있나? 여기선 까다롭게 굴면 살아남기 힘들어, 란테.” 일러스트: 우문
*본 도서는 15세 이용가로 재편집한 콘텐츠입니다.남자는 20분 늦게 나타났다.짜여진 판, 예정된 결과.마치 연극 같은 이 맞선이 시작되지 않길 바랐지만유주는 애써 속내를 감추고 미소를 꾸며냈다.“난 도승한, 당신이랑 결혼할 거예요.”“그럼 우리가 뭐, 연애라도 하자고 이러고 있을까.”건방지게 굴어서 좋을 건 없었다.적당히 그의 비위를 맞추며 반년만 버티면 되는 일.하지만 그는 사사건건 유주의 인내심을 시험했다.“사람 괴롭히는 게 취미예요?”“이제부터 취미로 삼아 볼까 하고.”나쁜 놈. 무례한 놈. 이 뻔뻔한.멋대로 건드리고, 마음대로 떠보고, 오만하게 만지며도승한은 단숨에 유주를 혼란에 빠뜨렸다.정신을 차리지 못하도록.그래서 그를 헤어나지 못하도록.“얌전히 굴어요.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끔찍한 결혼 사기극이 성대하게 막을 올렸다.그 끝엔 무엇이 있을지 모른 채.
*본 작품은 19세 관람가 작품을 15세이용등급에 맞게 클린버전으로 수정한 작품입니다.“내가 잡은 사냥감 중 가장 용맹한 것 같은데 어떻게들 생각하나.”음영이 깊게 져 그렇게 말한 염왕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설하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움직이지 마십시오.”등 뒤로 목책이 닿았다. 어디에도 도망갈 곳은 없었다.“쯧, 얼굴에서 온통 피비린내가 나시겠습니다.”말에서 풀쩍 뛰어내린 이가 그녀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해하려 다가오는 것처럼 위압적으로 보여 비명을 내지르고 싶어졌다. 갑옷이 부딪치는 쇳소리와 함께 눈앞까지 온 사내를 설하는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했다.“그 고기 한 덩이가 그리 중하십니까.”품에 꽉 움켜쥐고 있는 고깃덩이를 남자가 가져갔다.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져진 고기 한 덩이가 마치 자신처럼 보였다. 누구라도 조롱하고 짓밟을 수 있는 존재.“그러고 보니 그때보다 더 상하신 것도 같고.”사내의 손이 설하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온 것은 자신의 눈높이에 맞춰 허리를 숙였기 때문이다. 사르르, 반으로 묶여 있는 긴 사내의 머리칼이 그녀의 얼굴 옆으로 쏟아졌다.“살려… 주세요.”“누구를?”둘 중 누구를 살려 줄까 하는 다정한 물음이었다.거짓말. 둘 다 죽일 거면서. 황제와 똑같다. 가끔 신물이 나도록 다정하게 대해 주며 피어난 희망을 짓밟는 황제와 놀랍도록 이 사내는 닮아 있었다.“그대가 살고 싶다고 하세요. 그럼 눈감아 드릴 테니.”숨 막히게 달콤한 유혹에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얼굴의 반쪽, 화상을 입은 곳은 더 끔찍하게 일그러졌으나 사내에겐 아무런 상관도 없는지 오히려 얼굴을 더 가까이 마주 댔다.
“무엇이라도 좋습니다. 아기씨께서 저를 사내로만 만들어주신다면.”몰락한 귀족가의 여식 서은린의 꿈은 편찮은 아버지, 집안의 유일한 몸종인 도하와 오손도손 사는 것뿐이다.어느 날, 황궁 사람들이 집으로 들이닥쳐 황태자비가 되라는 황명을 전하곤 은린을 강제로 끌어낸다.북궁, 황궁 내에서 가장 어둡고 외진 데 유폐된 황태자의 비가 되라니, 그녀의 앞날은 그 북궁처럼 어둡고 춥기만 할 것이 뻔할 터. 은린은 죽음을 각오하고 제 마음을 따르기로 하는데…….※본 작품은 15세 관람가로 편집 되었습니다.※본 작품은 가상 역사를 배경으로 한 동양풍 사극 로맨스이며, 배경의 특수성을 나타내기 위한 단어들이 사용되었습니다. 호불호가 나뉘는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용에 참고 바랍니다.
한강 어딘가에는, ‘생명의 다리’라는 별명을 가진 다리가 있다고 한다.나는 아름다운 별명을 가진 그 다리에 가고 싶었다.그리고 그곳에서 그를 만났다.우연은 고등학생으로서 맞이하는 마지막 날 아침, 학교에 가는 대신 한강 다리에 가서 멋지게 번지점프를 하기로 결심한다.마포대교의 하얀 난간 앞에서 눈물을 문지르다 고개를 든 우연은 자신과 똑같이 강을 내려다보던 남자를 발견하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아름답다.우아한 실루엣과 풍부한 양감을 가진 몸.원초적일 만큼 뚜렷한 선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몸.어느새 우연은 여기까지 왜 왔는지 깜박 잊고 그를 관찰하기 시작했다.*“입학 선물, 제가 원하는 거 말해도 돼요?”고개를 들어 올린 우연의 발갛게 젖은 눈이 깜박깜박한다. 생생한 기대감이 화르르 뻗쳐오르고 있었다.“당연하지. 원하는 게 있으면 알려 줘. 최대한 구해 볼 테니. ……물론 너무 비싼 건 안 돼. 경복궁, 노이슈반스타인 성, 만리장성, 그런 건 곤란해.”이원의 농담을 알아들은 우연은 눈가에 물방울을 매단 채 키득키득 웃었다.“아저씨, 제가 나중에 아저씨한테 그림 그려 드린다고 약속했잖아요. 초상화.”“그랬지.”“그러면 당연히…… 모델도 해 주실 거죠? 어, 저기, 제가 아무리 기억력 상상력이 좋아도 전부 다 상상으로 그릴 순 없으니까요.”“……그야 그렇지. 그럼 선물이란 게, 나중에 모델…… 해 달라는 거니?”어리둥절했다. 고작 그런 걸 선물로? 초상화를 원한다면 당연히 해 주어야 하는 건데?대답은 바로 나오지 않는다. 이원이 화를 낼까 봐 겁내는 것처럼 작은 어깨가 둥그렇게 움츠러든다. 하지만 우연은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도저히 잘못 듣지 못할 만큼 또렷하게 대답했다.“누드모델…… 한…… 번만 해 주세요, 아저씨.”
* 15세 이용가로 개정된 내용입니다.한강 어딘가에는, ‘생명의 다리’라는 별명을 가진 다리가 있다고 한다.나는 아름다운 별명을 가진 그 다리에 가고 싶었다.그리고 그곳에서 그를 만났다.우연은 고등학생으로서 맞이하는 마지막 날 아침, 학교에 가는 대신 한강 다리에 가서 멋지게 번지점프를 하기로 결심한다.마포대교의 하얀 난간 앞에서 눈물을 문지르다 고개를 든 우연은 자신과 똑같이 강을 내려다보던 남자를 발견하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아름답다.우아한 실루엣과 풍부한 양감을 가진 몸.원초적일 만큼 뚜렷한 선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몸.어느새 우연은 여기까지 왜 왔는지 깜박 잊고 그를 관찰하기 시작했다.*“입학 선물, 제가 원하는 거 말해도 돼요?”고개를 들어 올린 우연의 발갛게 젖은 눈이 깜박깜박한다. 생생한 기대감이 화르르 뻗쳐오르고 있었다.“당연하지. 원하는 게 있으면 알려 줘. 최대한 구해 볼 테니. ……물론 너무 비싼 건 안 돼. 경복궁, 노이슈반스타인 성, 만리장성, 그런 건 곤란해.”이원의 농담을 알아들은 우연은 눈가에 물방울을 매단 채 키득키득 웃었다.“아저씨, 제가 나중에 아저씨한테 그림 그려 드린다고 약속했잖아요. 초상화.”“그랬지.”“그러면 당연히…… 모델도 해 주실 거죠? 어, 저기, 제가 아무리 기억력 상상력이 좋아도 전부 다 상상으로 그릴 순 없으니까요.”“……그야 그렇지. 그럼 선물이란 게, 나중에 모델…… 해 달라는 거니?”어리둥절했다. 고작 그런 걸 선물로? 초상화를 원한다면 당연히 해 주어야 하는 건데?대답은 바로 나오지 않는다. 이원이 화를 낼까 봐 겁내는 것처럼 작은 어깨가 둥그렇게 움츠러든다. 하지만 우연은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도저히 잘못 듣지 못할 만큼 또렷하게 대답했다.“누드모델…… 한…… 번만 해 주세요, 아저씨.”
재완은 제비였다. 누군가가 그랬다, 제비가 날자 배가 떨어진다고. 제비라는 놈들은 그렇게 날갯짓 한 번으로 배까지 먹는다는데, 그는 아직 제대로 된 제비가 아닌 모양이었다. 제비로 산다는 것이 퍽 녹록지 않은 걸 보면 말이다. 그래도 그렇게 바람에 몸을 맡기고 날다 보면, 어느 날엔가는 배가 떨어지겠거니 생각하며 그렇게 그냥 하던 대로, 흐르는 대로 살았다. 돈 많은 걸로 유명한 재벌가 차서연을 만나기 전까진. 젊은 나이임에도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재벌, 무엇보다 사연 있어 보이는 여자. 아직 제대로 된 제비가 아니라지만 이 정도면 꼬시기 쉽겠지? 작게 심호흡을 한 재완은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 넘기곤 여자의 옆으로 다가갔다. “누나.” 그는 싱긋 웃으면서 말을 꺼냈다.
왜 망국의 공주여야 할까. 상대는 절름발이에 이미 한 번 혼인을 한 이력이 있다. 거기다 그는 공주보다 다섯 살은 어리다. 그게 범윤에게 재미있게 느껴졌다. 화살이라도 스칠까, 칼날에라도 베일까 전장에 보내 달라는 그를 끼고돌던 어미가 가져온 말도 안 되는 신부.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그런데 상대는 생각보다 더 보잘것없었고, 생각보다 더 재미있었다. “그대에겐 죽은 자의 냄새가 난다.” “저는 전하를 황제로 만들어 드릴 겁니다.” 자신은 적이 아니라고 말하던 망국의 공주. “첫날 밤에는 낭군이라 잘도 불러주시더니. 서운합니다, 부인.” “농이라고 하세요, 빨리.” 범윤이 그 무너진 얼굴을 보며 느른하게 웃었다. “내 밤에 부인의 처소로 찾아가겠습니다.” “전하….” “부인께선 귀하게 받들어 줄 때 얌전히 내 존중이나 받는 게 좋을 겁니다.” 태생부터 오만하게 자란 범윤의 경고가 뚜렷하게 귀에 박혔다. 일러스트: 감람
*본 작품은 19세 관람가 작품을 15세이용등급에 맞게 클린버전으로 수정한 작품입니다.*작품 속에 나오는 바다뱀 전설은 그리스 로마 신화 중 헤라클레스와 바다뱀 이야기를 상상력을 더해 각색, 재해석했습니다.“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같이 해야지. 서로를 원해서 온 거니까.”그 말에 심장이 저 바닥 끝까지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얼마나 황홀할까. 서로가 원해서 온 시기에 배를 맞추는 게.”머리가 아찔했다. 기린은 도망갈 수 없었다. 분명 아래층엔 자신이 질색하는 그것들이 있으리라. 눈앞에서 움직이는 그의 혀는 교활했다. 믿을 수 없다는 걸 아는데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기린은 모르겠지만 뱀딸기들은 독특했다. 자신의 첫 번식기 상대를 평생 잊지 못한다.“보통은 그래서 첫 상대와 계속 교미하지.”머리끝까지 열이 오른 것도 숨을 헐떡이는 것도 전부 자신이 첫 상대이기 때문이다.그녀가 열매를 맺겠다고 결심한 상대.려언이 잔악한 감정을 잠시 밀어 뒀다.“물론, 나도 뱀과 사매의 번식은 들어 보지 못했지만.”일러스트: 진사
“그놈한테 가고 싶다는 말로 들리는데.” 자신이 내뱉은 말에 제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얼굴에 감정이 다 드러난다.그가 사는 세상에는 좀처럼 없는 일이라 단이 입가를 슬쩍 비틀었다. “난…….”“아님 갈 곳이 있나?” 제나의 말을 싹둑 자른 그가 손을 들어 셔츠 단추를 천천히 풀었다. 갈 곳…… 정곡을 찔린 제나가 입술을 물었다. 없다, 갈 곳은. 이제 제나가 갈 곳은 어디도 없었다.제나는 그의 탓도 아닌데 그를 보며 눈에 힘을 주었다. 단은 금방이라도 물기를 쏟아낼 것 같은 제나의 말간 얼굴을 보자 조금 전까지 있었던 두통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왜 도와주신 건데요?” 그녀의 물음에 그의 눈썹이 스윽 올라갔다. 그에게서 나는 묘한 체취에 머리가 어지럽다. 시린 그의 눈빛을 감당하지 못하고 제나가 시선을 그의 목덜미로 내렸다. 가슴께까지 벌어진 셔츠에서 그가 손을 뗐다. 그 손이 허리에 짚는 걸 제나의 눈동자가 따라갔다. “빚은 갚아야지.”<[본 도서는 15세 이용가로 개정된 도서입니다]>
“진짜 내가 업어 키웠는데.” 보들보들한 까만 머리카락, 뽀얀 얼굴에 통통한 뺨, 인형처럼 동그란 눈. ‘귀엽다.’ 둘이 크면 결혼시키면 되겠다고 아빠들끼리 농담하긴 했지만. 아빠 친구 아들, 다섯 살 어린 성민은 채은이 바랐던 완벽한 동생의 모습이었다. “누나, 나 넘어졌어. 아파. 허엉.” “보건실 가자.” “다리 아파. 누나.” 채은은 그 작은 몸을 업고, 성민의 가방을 손에 들었다. 등에 느껴지는 아이의 체온이 따끈따끈해서, 조금 더웠다. 성민을 챙기는 채은을 보고 친구가 물었다. “채은아, 걔 사촌 동생이야?” “아니. 그냥….” 아무리 생각해도 성민을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아는 동생.” 채은에게 성민은 그렇게 업어 키운, 아는 동생이었는데…. “누나, 우리 언제 결혼해?” “누나, 해도 돼?” “누나, 좋아?” 어쩌다 일이 이렇게까지 됐는지 모르겠지만. “누나 그런 사람이었어? 이렇게 막 버리는?" 되돌아가기에 너무 늦은 건 확실했다. ※ 본 작품에는 외전이 포함되어 있으니 이용 시 참고 바랍니다.
유디트는 살아있는 용을 본 적이 있다. 그 녀석의 이름은 세르피온. 불길하다는 붉은 눈을 타고났음에도 오로지 능력만으로 자수성가한 희대의 대마법사이자 마탑 랭킹 1위에 빛나는 상아탑의 주인. 사람들은 그런 그를 두고 전설 속의 드래곤이 살아 돌아온 것 같다고 찬양했다. 영원히 빛이 바래지 않는 저 새하얀 상아탑처럼 그의 이름 또한 영원히 빛날 줄 알고 얼마나 배가 아팠던가. [세르피온 미르노이아. 만장일치로 해임.] 하지만 그 신화가 비로소 막을 내렸다. 그냥 막을 내린 것도 아니라 완전히 끝이 났다. [죄인 세르피온을 1급 위험인물로 지정. 루멘티아의 모든 기관에서 영구 제명한다.] 한때 루멘티아의 가장 빛나는 별이었던 녀석은 하루아침에 전과자가 되어 내쫓겼다. 이룬 업적도 많고, 영웅으로까지 추앙받던 놈이지만 전혀 불쌍하지 않았다. 그가 금기 마법을 시전하지 않았더라면. 시전 하더라도, 이후에 제대로 반성하는 모습만 보였더라면. 그렇지 않더라도, 평소에 사람들에게 싸가지 없게 굴지만 않았더라면. 그래서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손절하지만 않았더라면. 세르피온 같은 대마법사가 이렇게 비참하게 추락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게 성질을 X대로 부리더니 결국 X 되었구나! 누구보다 그 싸가지를 잘 알고 있던 유디트는 깔깔대며 세르피온의 처지를 비웃었다. “안녕. 유디트. 오랜만이지?” 그 당사자가 저를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모르고. 8년 만에 재회한 그는 여전히 뻔뻔하고 당당하게 거래를 제안했다. “내가 널 대마법사로 만들어 줄게.” 마력이 없어 마법사도 되지 못한 그녀를 대마법사로 키워 주겠다고. “하지만, 너. 이제 알거지잖아?” 모든 것을 잃은 빈털터리의 몸으로. 일러스트: 무트
나, 태이섭. TK그룹의 압도적 후계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34년 수절 인생을 살아왔것만. 동갑내기 사촌이자 라이벌이었던 태준섭과의 경쟁에서 현재 스코어는 압도적 패배. 인생의 목표가 무의미해진 지금, 만사가 귀찮을 뿐이다. 유럽 출장이라는 핑계로 실컷 놀고 왔더니, 입사동기인 강민경이 비서 겸 업무보좌를 맡는단다. 수석으로 입사해 나에게 차석이라는 좌절을 맛보게 했던 그 강민경이. 나, 강민경. TK 간부 승진 코스를 착실히 밟으며 탄탄대로를 걷는가 싶더니만. 예쁜 외모에 더러운 인간성. 집요하고 쪼잔한 성격에 위선의 달인인 TK 황태자, 태이섭을 보좌하란다. 이제 모 아니면 도. 로또 아니면 쪽박이다. 후자의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점이 문제지만. 책 속에서 “능력 인정. 홍보실에서 송백재 수발을 들었으면 실크로드였는데. 어쩌다가 샜어요? 이렇게?” “새다니요, 저는 전무님 모시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강 차장.” 이섭이 손을 까닥했다. 민경은 뒷좌석으로 고개를 조금 더 빼어 돌아다보았다. “입술 좀 봐.” “네?” 운전대를 쥐고 있던 김 기사가 어깨를 움칫 떨었다. 이섭의 시선이, 당황하여 반쯤 벌린 채로 굳어 버린 민경의 입술을 향했다. “바싹 말라 있네. 침도 안 바르고. 어? 무슨 그렇게 아침부터 거짓말을. 이제부터 그러지 마요.”
※ 본 작품은 강압적 관계, 가스라이팅 등 호불호가 나뉠 수 있는 키워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도서 이용에 참고 부탁드립니다. 하녀의 배를 빌려 태어난 구박데기 왕녀, 피비 엔시스. 그녀는 하루아침에 볼모가 되어 제국에 팔려 갔다. 거부할 수 없었다. 삶의 이유인 어머니가 인질로 잡혀 있었으므로. “앞으로 내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한다면 왕녀가 모친과 여생을 누리게 해 주지.” “…만약 그리 해 주신다면, 제 몸과 영혼을 온전히 전하께 바칠게요.” 그녀의 주인이 된 황태자는 아름답고 섬뜩한 사내였다. 피비는 그에게서 수치심과 쾌락을 배웠다. 차츰 그에게 마음을 열기까지 했다.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무슨 말씀이세요, 전하…. 어머니가 이미 죽었다뇨…?” 일러스트: MUCUZ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