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명관
천명관
평균평점
고래

1993년 12월, 한국문학의 새로운 플랫폼이고자 문을 열었던 문학동네가 창립 20주년을 맞아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을 발간, 그 첫 스무 권을 선보인다. 문학의 위기, 문학의 죽음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그래서 문학의 황금기는 언제나 과거에 존재한다. 시간의 주름을 펼치고 그 속에서 불멸의 성좌를 찾아내야 한다. 과거를 지금-여기...

나의 삼촌 브루스 리 1

<나의 삼촌 브루스 리 1> “산다는 것은 그저 순전히 사는 것이지,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이소룡) 어차피 인생이란 납득할 수 없는 한 편의 부조리극 그것이 비극이든 희극이든 우리는 꾸역꾸역 살아남아 각자의 역사를 남겨야 한다! 희대의 이야기꾼 천명관이 오랜만에 펼쳐 보이는 굵직한 서사의 향연! 격동의 한국현대사 속에서 질기고 순수하게 살아남은 한 남자의 인생 유전 천명관이 강렬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왔다. 한국 문단을 들썩이게 만들었던 작품『고래』이후, 그만의 선 굵은 장편 서사를 기다려온 독자들에겐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기존 소설의 영역을 훌쩍 뛰어넘어 ‘마술적 리얼리즘’의 환상적인 세계를 펼쳐 보였던 그가 이번에는 한국적 현실의 공간 안에서 인생의 의미를 온몸으로 새겨낸 한 남자의 일대기를 그렸다. 이 작품은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한국식 근대화의 압축 성장을 거치며 평범한 개인들이 고달픈 삶을 살아내는 과정을 천명관 특유의 흡인력 있는 화법으로 담아냈다. 화자인 나의 시선으로 바라본 삼촌의 이야기는 70년대 영웅의 상징 ‘이소룡’에 대한 추억으로 시작된다. 할아버지가 바깥살림을 차려서 낳은 서자로 들어와 어릴 때부터 눈칫밥을 먹으며 성장한 삼촌에게 이소룡은 비루한 자신의 인생을 구원해 줄 그 무엇이다. 그러나 태생부터 원조나 본류가 될 수 없었던 삼촌의 운명은 험난하기만 하다. 이소룡을 추종했으나 끝내 저 높은 곳에 다다르지 못하고 모방과 아류, 표절과 이미테이션, 짝퉁인생에 머물게 되는 한 남자의 기구한 삶이 70년대 산업화, 80년대 군부독재와 민주화혁명, 90년대 본격 자본주의 시대를 배경으로 파란만장하게 펼쳐진다. “대관절 이놈의 인생은 왜 이리 신산스럽고 혹독하기만 한 것일까?” 가혹한 인생의 아이러니, 그러나 불문곡직 삶을 끌어안는 실패와 좌절의 연대기 천명관은 장편 데뷔작 『고래』에서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신화적인 상상력을 질펀한 해학과 능청스런 입담으로 녹여내면서 소위 내면문학, 사색적인 문장 중심의 한국문학에 ‘스토리텔링’의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바 있다. ‘전통적 소설학습이나 동시대의 소설에 빚진 게 없다’는 평가는 그의 소설작법에 대한 문단의 충격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정작 천명관은 자신이 70~80년대 한국문학에 크게 영향 받았다고 고백한다.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도 꾸역꾸역 자기 앞에 놓인 삶을 감당해가는 인간군상의 희비애락을 그려내는 전통적 소설양식이 그것이다. 실제로 『고래』이후 그의 작품들에선 키치적 아우라나 기이한 상상력의 전조는 약해지고, 오히려 현실에 발붙이고 살아가야 하는 고달픈 인생들에 방점이 찍혀 있다. 나아가 이번 소설에는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작가의 진지하고 애정 어린 성찰이 담겨 있다. 인생의 아이러니, 진실의 탈을 쓴 가혹한 운명과 마주한 인물들이 경험해 가는 실패와 좌절의 연대기는 어찌 보면 가학과 피학의 에너지로만 점철된 듯하지만, 그 안에서 소리 없이 자라나는 한 가닥 삶에의 열정이야말로 천명관이 추구하는 최종의 서사전략이다. 『나의 삼촌 브루스 리』는 천명관 서사의 장점과 대중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영화를 보는 듯 선명하고 힘 있는 이야기, 촘촘하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장르적 컨벤션, 『고래』에서 보여준 예의 구성지고 날렵한 문장들은 과연 그가 왜 최고의 이야기꾼이라 불리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언제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본 듯한 우리네 신산스런 삶의 이야기들을 능란하게 들려주면서도 때로 그 익숙한 것들의 폐부를 가차 없이 찔러대는데, 관습과 편견을 풍자하거나 치졸한 욕망과 권력의 힘을 희화화시켜 조롱함으로써 가슴 싸한 쾌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또한 대한민국 30년 정권의 변천사를 틀거리 삼아 그 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회적 악행과 시대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인간군상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사회비판적인 리얼리티를 더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를 움직인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콤플렉스 아니었을까?” 생의 언저리를 겉돌며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꿈과 욕망에 관한 이야기 유랑과 방외(方外)의 삶, 그리고 부서진 희망의 흔적 앞에서 기웃거리는 애처로운 자의식은 천명관 소설의 캐릭터가 갖고 있는 특징이다. 『나의 삼촌 브루스 리』의 주인공들 역시 삶의 주변부를 맴도는 쓸쓸한 정서를 공유한다. 한편으로 그것은 차마 포기할 수 없는 구원에의 열망과도 맞닿아 있다. 이소룡을 정의와 완성의 이미지로 승화시켜 좇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결국엔 첫사랑 원정을 향한 사랑의 힘으로 자신의 삶을 완성하는 삼촌, 멀고 먼 길을 돌고 돌아서야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여배우 원정의 러브스토리는 결국 구원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의 분신이자 삼촌의 일대기를 들려주는 내레이터인 ‘나’는 삼촌뿐 아니라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고단한 인생사와 우여곡절의 사연들까지 밀도 있게 전달한다. 삼촌이 유년과 청년시절을 보냈고 훗날 조폭 이권다툼의 아수라장으로 변모하는 동천읍, 상경하여 처음 인연을 맺게 되는 충무로의 북경반점, 동천의 건달들과 조우하는 삼청교육대, 액션 대역배우로 활동하면서 근거지로 삼는 충무로는 소설의 주 무대로, 그 위에서 펼쳐지는 인간군상들의 흥망성쇠는 근대화 과정 속에 피어난 한국인의 욕망과 회한을 대변한다. 근친상간에서 잉태된 독극물의 여왕 오순, 역전파 깡패 한자리 꿰차는 게 평생의 목표인 도치, 더할 나위 없이 성깔 있으면서도 한없이 외로운 화교 출신 중국집 여사장, 삼청교육대의 야차 같은 교관들, 그리고 자본과 권력의 야합으로 탄생한 영화판의 기이한 색광들까지……. 작품 도처에서 끓어넘치는 악역과 조연의 캐릭터는 이 소설을 더욱 입체적이고 풍성하게 만드는 포인트다. 작가가 영화에 보내는 긴 작별인사 같은 소설 그러나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이 소설은 10개월간 예스24 블로그를 통해 처음 선보였다. 통상 5~6개월 진행되는 기존의 소설연재에 비하면 꽤 긴 여정이었지만, 무궁무진 뻗어나가는 작가 특유의 스토리텔링에 독자들의 관심은 고조되었다. 또한 매회 연재분량마다 함께한 일러스트레이터 이강훈의 삽화는 소설의 재미를 증폭시키며 ‘나의 삼촌 브루스 리’의 캐릭터 역할을 톡톡히 담당했다. 하지만 연재 후에도 소설의 결말에 대한 작가의 고민은 오래 이어졌고, 결국 책에서는 바뀐 결말을 선택했다. 천명관의 소설엔 늘 영화에 대한 애정이 깔려 있다. 하지만『나의 삼촌 브루스 리』는 그가 영화에 보내는 긴 작별인사가 될 것이라고 한다. 작가의 청춘을 지배했고, 하여 지금까지 그의 작품세계에 중요한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는 영화와 그것을 둘러싼 이야기는 이번 소설에서 더욱 극적이고 애틋하게 그 소명을 다한다. 사람들은 언제나 영화처럼 멋진 인생을 꿈꾸며 극장과 TV 앞으로 꾸역꾸역 모여든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손에서 소설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어쩌면 모든 소설은 결국 실패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소설을 읽는 이유가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그것이 커다란 행복을 가져다주진 못하더라도, 그리고 구원의 길을 보여주진 못하더라도 자신의 불행이 단지 부당하고 외롭기만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래서 자신의 불행에 대해 조금 더 잘 이해하게 된다면 그것은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요? 나는 언제나 나의 소설이 누군가에게 그런 의미가 되길 바랍니다.”

고령화 가족

<고령화 가족> 도대체, 이놈의 집구석엔 멀쩡한 사람이 아무도 없단 말인가! 아저씨, 내 이름 알아요? 조카 이름도 모르는 삼촌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기집애, 넌 싸가지만 없는 줄 알았더니 의리도 없냐? 저게 이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남자를 집으로 끌어들여? 데뷔 영화가 흥행에 참패한데다 ‘그해 최악의 영화’에 선정되기까지 하면서 십 년 넘게 ‘충무로 한량’으로 지내던 오십줄의 늙다리 ‘나’에게 남은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다. 아내는 일찌감치 곁을 떠났고, 알량한 월세보증금은 밀린 방세로 다 까이고, 세간마저 하나둘 팔다보니 남은 거라고는 늙고 초라해진 몸뚱이뿐. 탈출구도 보이지 않는 회생불능의 상황에 처한 ‘나’에게 “닭죽 쑤어놨는데 먹으러 올래?”라고 무심한 듯 물어오며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엄마. 고민의 여지 없이 나는 다시 엄마 집으로 들어가 살기로 한다. 엄마 집엔 이미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보상금으로 받은 돈을 사업한답시고 다 날려먹고 지금은 120kg 거구로 집에서 뒹굴거릴 뿐인 백수 형 ‘오함마’가 눌어붙어 사는 중이고, 곧이어 바람피우다 두번째 남편에게서 이혼을 당한 뒤 딸 ‘민경’을 데리고 들어오는 여동생 ‘미연’까지, 우리 삼남매는 몇십 년 만에 다시 엄마 품 안으로 돌아와서 복닥복닥 한살림을 시작한다. ‘사람은 그저 잘 먹는 게 최고’라며 자식들에게 매일같이 고기반찬을 해 먹이는 엄마, 그 고기 한 점 더 먹겠다고 아귀같이 달려드는 형, 허구한 날 남자를 갈아치우는 카페 마담 여동생, 맞춤법 하나 제대로 모르면서 피자 한 판은 저 혼자 다 처먹고 담배나 꼬나무는 조카. 도대체 이놈의 집구석엔 제대로 된 인간이 아무도 없느냐고 탄식해보지만, 어라? 지금껏 나만 모르고 있던 우리 가족의 과거사와 각자가 감춰두고 있던 비밀들이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집을 떠난 지 이십여 년 만에 우리 삼남매는 모두 후줄근한 중년이 되어 다시 엄마 곁으로 모여들었다. 일찍이 꿈을 안고 떠났지만 그 꿈은 혹독한 세상살이에 견디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이혼과 파산, 전과와 무능의 불명예만을 안고 돌아온 우리 삼남매를 엄마는 아무런 조건 없이 순순히 받아주었다. 그리고 그 옛날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 다시 끼니를 챙겨주기 시작했다. (……)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자식들을 집으로 데려가 끼니를 챙겨주는 것뿐이었으리라. 어떤 의미에서 엄마가 우리에게 고기를 해먹인 것은 우리를 무참히 패배시킨 바로 그 세상과 맞서 싸우려는 것에 다름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엄마가 해준 밥을 먹고 몸을 추슬러 다시 세상에 나가 싸우라는 뜻이기도 했을 것이다. 엄마 집으로 들어와 살게 되면서 새삼 깨닫게 된 것은 엄마에 대해 내가 아는 바가 별로 없다는 사실이었다. 생각해보면 엄마의 사생활은 물론 엄마의 성격에 대해서도 별반 아는 게 없었다. 그동안 내가 생각한 엄마는 그저 생활력 강하고 약간의 허영심이 있는 보수적인 노인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엄마는 나를 여러 번 놀라게 했다. 젊은 시절, 외간남자와 눈이 맞아 자식들을 팽개친 채 야반도주를 하기도 하고, 어두운 진실을 사십년간 감쪽같이 덮어둔 채 배 다른 자식과 씨 다른 자식을 억척스럽게 한 집에서 밥해 먹여 키우고, 세상사에 실패하고 돌아온 자식들은 다시 거둬주고, 뒤늦게 재회한 옛사랑을 불륜의 씨앗인 딸의 결혼식장에 불러들인 엄마라는 여자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세련되지도 쿨하지도 않은 이들 가족의 좌충우돌 생존기를 통해 작가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보금자리도 아닌, 인생을 얽매는 족쇄도 아닌 ‘가족’의 의미를 찾아간다. 우리 주변에 흔하디흔한 것이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고, 또 뻔하디뻔한 것이 가족에 대한 사랑 이야기라고? 찌질하지만 구차하지 않고, 애틋하지만 질척거리지 않는, 개성 만점의 톡톡 튀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것은 ‘희대의 이야기꾼’ 천명관이 들려주는 가족 ‘이야기’다!

퇴근

<퇴근> 천명관 작가가 현실의 지표를 따라가 당도한 디스토피아 「퇴근」은 한국의 미래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곳에서는 10%의 슈퍼리치들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담요’라 불리는 90%의 실업자들은 ‘일’과 거기에 부수된 일상, 존엄 등에서 제외된 채 정부에서 나눠주는 바우처를 받아 최소한의 생계만을 유지하고 있다. 90%에 속하는 주인공 ‘그’는 천식을 앓고 있는 아이의 약을 구하기 위해 굶다시피 해서 바우처를 모으지만 그마저도 현실의 벽에 부딪혀 결국 슈퍼리치에게 아이를 입양보내기로 결정하는데…….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천명관은 그 이름 자체로서 힘이 넘치고 독자를 유쾌하게 만드는 작가이다. ‘희대의 이야기꾼’으로서 등단 이후 꾸준히 ‘폭발하는 이야기의 힘’을 선보여온 작가 천명관이 7년 만에 두번째 소설집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를 선보인다. 풀리지 않는 인생, 고단한 밑바닥의 삶이 천명관 특유의 재치와 필치로 살아나는 여덟편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여전히 웃음이 나면서도 어느 순간 가슴 한구석이 턱, 막히는 먹먹한 감동을 얻게 되고 그 여운은 진하게 오래 남는다. 그사이 천명관의 유머에는 따뜻한 서정과 서글픈 인생에 대한 뜨거운 위로가 더해졌고, 통쾌한 문학적 ‘한방’은 더욱 강렬해졌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 천명관 4년 만의 장편소설, 더욱 강력한 페이지터너로 돌아왔다! 롤러코스터를 탄 듯 아찔하게 펼쳐지는, 수컷들의 한 바탕 소동과 구라의 향연 명실공히 한국 최고의 이야기꾼 천명관이 신작 장편소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를 예담에서 출간했다. 나의 삼촌 브루스 리 이후 4년 만이다. 격동의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한 남자의 기구한 인생 유전을 통해 굵직한 서사의 힘을 보여줬던 그가 이번에는 뒷골목 건달들의 한바탕 소동을 다룬 블랙코미디를 선보인다. 인천 뒷골목의 노회한 조폭 두목을 중심으로 인생의 한방을 찾아 헤매는 사내들의 지질하면서도 우스꽝스런 이야기는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 입체적이고 생생하다. 서사를 이끌어가는 천명관 특유의 능청스러운 입담도 여전하거니와 무엇보다 대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사내들의 거친 입말과 구라가 파도를 탄 듯 아슬아슬하게 술렁거린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정말 멍청한 건지 아니면 멍청한 척하는 것인지 모르게 이어지는 대화는 소설 제목처럼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라고 정의 내리는 순간, 남자의 세상이 얼마나 허술하고 어설픈 욕망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새삼 확인하게 만든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펼쳐지는 선문답과 엉뚱한 행동들은 실소를 머금게 하지만, 사뭇 진지한 태도로 각자의 앞에 놓인 사건들을 처리해 나가는 인물들은 비애감마저 갖게 한다. 상대가 의인인지 악인인지, 내 편인지 적의 편인지 판단할 수 없는 비열한 세상. 그러나 끈질기게 살아남아 자신의 성공을 증명하고 싶은 사람들. 천명관은 이 소설에서 건달들의 삶을 희화화시켜 한껏 조롱하면서도 동시에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이야기임을 증언한다.

유쾌한 하녀 마리사

<유쾌한 하녀 마리사> 이 시대의 이야기꾼 천명관 첫 소설집 『유쾌한 하녀 마리사』 출간 기존 소설의 영역을 훌쩍 뛰어넘어 소설의 경계를 저 멀리 밀어내버린 문제작 『고래』(2004)의 작가 천명관이, 또다른 소설의 공간을 열어 보인다. 첫 소설집 『유쾌한 하녀 마리사』에는 작가의 데뷔작이자 2003년 문학동네신인상 수상작인 「프랭크와 나」를 비롯, 지금까지 발표한 열한 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다. ‘소설’을 밀쳐내면서 끌어당기는 ‘이야기’의 세계 『고래』가 소설 바깥에 존재하는 소설 이전과 소설 이후의 것들, 예컨대 온갖 기담과 민담, 영화와 무협지 등 키치와 대중문화의 파편들을 한데 그러모아 한바탕 이야기의 장을 펼쳐 보이면서, 그 ‘이야기’의 힘으로 기존 소설의 문법을 통렬하게 일탈하고 소설의 서사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유도했다면, 『유쾌한 하녀 마리사』는 비교적 개연성과 핍진성, 리얼리티를 갖춘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다. 열한 편의 중단편에서 작가의 시선은 경탄을 자아내는 환상적인 이야기의 활력보다는 현실과 인간관계에서 한 개인이 부딪히게 되는 곤경이나 사소한 소동과 갈등들 그리고 그와 연루된 곤혹이나 회환과 같은 심리적 양태들을 주목한다. 때문에 『고래』에 출몰했던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은 그 형태를 바꿔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짐작할 수 없는 일들’이다. 운명과 그 운명에 의해 지배되고 조종되는 인생이라는 것 자체가 무력한 개인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부조리와 아이러니로 가득한 법. (도대체 이놈의 인생살이가 내 뜻대로 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더란 말인가!) 천명관의 단편들은 ‘저 짐작할 수 없는 일들’, 내 뜻과는 정반대로 움직이는 일들의 아이러니에 대한 유머러스한 보고서다. * ● 백수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남편’의 무료한 일상이, 캐나다에 살고 있는 사촌 ‘프랭크’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프랭크와 나」(한국의 평범한 백수 남편이, 캐나다에 살고 있는 스위스계 백인 여인과 사랑에 빠진 미국의 조폭과 조우하게 되는 이 웃지 못할 상황이라니!) ● 여동생과 바람난 남편에게 유서를 남기고 독이 든 샴페인을 마시지만, 우리의 ‘유쾌한’ 하녀 마리사의 실수(? 자기가 죽는 대신 남편을 독살하고픈 ‘나’의 무의식을 무심코 대신 실현해주는)로 정작 죽음을 맞이한 사람은 결국, 독자와 함께 천천히 유서를 읽어내려가며 동페리뇽을 홀짝거렸던 작가 남편이었다는 통쾌한 복수극, 「유쾌한 하녀 마리사」(전국의, 아니 전 세계의 바람난 남편들이여, 비싼 샴페인을 준비해두는 어수룩한 아내들을 조심할지어다!) ● 토머스 칼라일의 뛰어난 원고를 불쏘시개로 씀으로써 그에 대한 질투에 눈이 멀어 그것을 없애버리고 싶은 존 스튜어트 밀의 내밀한 욕망을 대신 실현시켜준 하녀 위즐리 부인의 이야기인 「프랑스혁명사--제인 웰시의 간절한 부탁」,(간절히 바라면 가끔은 이루어지는 것도 있더이다, 삶이라는 것이.) ● 어린 시절부터 평생을 연습해온 유리 겔러 식 숟가락 구부리기, 그러나 어찌어찌 회사에서 잘리고, 가족들에게서 퇴출당하고, 노숙자들의 무리에 섞여 있다보니 이들이야말로 이미 일상을 초월한 진짜 초능력자들이더라(눈짓 한번에 숟가락 구부리기, 조금만 정성들여 쳐다보면 식탁 옮기기)……, 「숟가락아, 구부러져라」,(간절히 원하면 되긴 된다니까!) 배반하는 이야기, 그 유쾌한 아이러니! 『고래』가 끝없이 확장되는 이야기, 제 스스로 뻗어나가는 이야기였다면, 『유쾌한 하녀 마리사』는 현실과의 긴장을 놓지 않고, ‘소설 밖의 이야기’를 소설 안으로, 현실을 사는 우리의 옆자리로 끌어다놓는다. 그리하여, 예기치 않게 전개되는 일련의 사건들, 우리의 일상 속에 숨겨져 있는 삶의 비의를 무심하게 건드린다. 툭툭, 별것 아니라는 듯이. 해프닝으로 시작된 사건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가벼운 반전으로 이어지고, 맥없이 튀어나왔던 헛웃음은 어느새 쓴웃음으로 뒤바뀐다. 그러나, 한없는 우울과 허무를 동반한 삶의 아이러니와 페이소스를 작가는 자기만의 방식--정서의 단절과 비약, 집중과 이완, 엇갈림과 교체, 화제의 전환과 이를 통한 이야기 흐름의 돌연한 전변(轉變)--으로 유쾌하게 조율한다. 제멋대로 흘러가는 인생, 단단해 보이지만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얇은 껍데기 아래 잠복해 있는 이 비정한 현실. 천명관은 이 웃지 못할 삶의 순간을, 우리 곁에 도사린 ‘잔혹한’ 일상의 면면을 더없이 경쾌하고 담백하게, 또한 유머러스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어느 하나로 정리되거나 간결하게 정의할 수 없이 복잡 미묘하게 꼬여 돌아가는 삶의 부조리와 아이러니가 농담과 유머를 빌려 저 스스로 주장하는 세계, 그것이 어쩌면 천명관의 세계일 것이다. 어쨌거나, 삶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으니까 말이다. * 천명관의 소설은 여하간 그렇게 전통적으로 ‘소설적인 것’이라 일러왔던 것의 방외에 있고, ‘현실’의 방외에 있으며, 한국 문단의 방외에 있다. 『고래』에서 보듯이 천명관이 그 놀라운 입심으로 시정에 떠도는 잡스런 이야기를 그러모아 전해주는 이 시대의 패관(稗官)의 모습을 능란하게 보여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실은 그와 전혀 무관하다 할 수 없다. 무리를 떠나 먼 곳을 떠돌던 그는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를 수집해 불쑥 돌아와 한국소설이 알지 못했고 가지 않았던 길 하나를 열어놓았고, 그것이 바로 저 스스로 증식하며 무궁무한 종횡무진 뻗어나가는 무국적적인 이야기의 세계다. (……) 과연 그는 먼 곳에서 온 사람이고, 더 나아가 여기 있어도 여기 없는 사람이다. _김영찬(문학평론가) 그의 소설은 근대 서사의 외피를 빌려 입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의 엄격한 틀에 갇혀 있지만도 않다. 오히려 여기 이곳의 현실적 재현의 문제를 떠나, 모호한 상징의 세계를 떠나, 표면에 집중하는 간결한 서사로 삶의 아이러니를 포착하려 든다. 따라서 거기에는 내면 과잉의 존재가 들어서지 않거니와, 의미 과잉으로 골머리를 앓지도 않는다. 결국, 천명관의 서사는 상상력의 유희를 극대화함으로써 기존의 서사적 관행으로부터 탈주하고자 하는 일련의 노력의 결과물이다. _이정석(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