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숨
김숨
평균평점 5.00
제비심장

<제비심장> 2021 올해의 문제소설 선정 노동의 폐허에 스며든 잿빛 심장의 노래 ‘기억의 증언자’ 김숨 신작 장편소설 『제비심장』 출간 현대문학상·대산문학상·이상문학상·김현문학패 수상 작가 김숨. 입양아, 철거민에서 ‘위안부’ 피해자와 강제 이주 고려인까지, 제자리에서 뿌리 뽑힌 사람들에 주목해온 그가 사려 깊되 집요한 시선으로 조선소 하루살이 노동자의 삶을 뒤쫓는다. 장편소설 『제비심장』은 그가 『철』 이후 13년 만에 다시 써낸 조선소 이야기다. 「철(鐵)의 사랑」([문장 웹진] 2020년 6월호), 「철(鐵)이 노래할 때」([릿터] 2017년 10/11월호) 등 그간 여러 지면을 통해 연작 형태로 발표했던 소설을 장편으로 엮었다. 같은 노동자를 세 부류로 나누는 다단계 하도급 구조, 외국인 이주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의 등장은 그가 내내 조선소 주위를 맴돌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한다. 『제비심장』의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철상자 안에서 길을 잃는다. 작업을 끝내고 철상자에서 나오던 ‘선미’는 그 안에 갇혀 죽음을 맞는다. ‘나’는 당시 선미의 짝이었던 ‘최 씨’를 보며 그가 한 번쯤 뒤를 돌아보았다면 선미가 철상자 안에 혼자 남겨져 길을 잃는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은 누구 탓일까’ 거듭 되묻던 ‘나’는 이윽고 깨닫는다. “하루살이 노동자인 나는(우리는) 조선소에서 유령과 같아 실은 철상자 안에 없”다는 것을. 그러니까 “나는(우리는)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 없다”는 것을.

국수

<개정판 | 국수> 다시 만나는 김숨 소설 미학의 한 정점 국수처럼 질긴 가족이라는 인연, 그 관계에 대한 아름다운 성찰 * 창비에서는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는 작품들을 엄선해 새로이 단장한 ‘리마스터판’을 출간하고 있습니다. 한국문학의 새로운 고전으로 자리 잡은 작품들이 오늘의 젊은 독자들에게 한층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산문학상, 이상문학상 등 주요 문학상을 연달아 수상하며 뛰어난 작품성을 입증해온 소설가 김숨. 가족의 의미와 그 관계의 틈을 특유의 강직함으로 집요하게 묘파해냈던 소설집 『국수』를 8년 만에 ‘리마스터판’으로 새롭게 선보인다. 이번 리마스터판은 기존 책에 실린 단편 9편 중 3편을 덜어냈으며, 세심한 손끝으로 문장을 꼼꼼하게 손본 뒤 작품 순서도 다시 배치함으로써 각 작품이 점한 위치와 색깔을 좀더 뚜렷하게 정립했다. 국수처럼 질긴 가족의 인연을 놀라운 디테일을 통해 보여주는 작가는 가족관계 이면에 깔린 불안한 정서를 다소 비현실적인 색채로 드러내지만 리얼리즘 소설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 성찰의 결과로 가족이 착취의 제도일 뿐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을 보여주면서도 작가는 때로 따듯한 국물에 풀어진 부드러운 국숫발처럼 가슴속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주기도 한다. 고독으로 인한 내면적 혼란을 겪는 인물들을 다룬 『국수』는 성실하고도 치열한 김숨 소설 미학의 한 정점을 보여준다. “김숨은 지금까지 한번도 멈춤 없이 꾸준하게 자신만의 개성적인 문학세계를 만들어온 작가이다.” (제58회 현대문학상 심사평) 이 소설집에서 깊이 집중하는 관계는 ‘가족’이다. 부부의 갈등과 균열을 사회적 층위와 연결 지어 긴장감 있게 그리는 동시에(「그 밤의 경숙」 「막차」),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불편한 동거를 기묘한 분위기로 드러내기도 하고(「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 증오만 남은 부자 관계를 극도의 공포에 휩싸인 집단 살육의 현장과 중첩시켜 표현하기도 한다(「구덩이」). 현대문학상 수상작 「그 밤의 경숙」은 사소한 접촉사고로 얼룩진 하룻밤을 그린 작품이다. 콜센터 직원 경숙의 남편과 퀵서비스 기사 사이에서 접촉사고가 날 뻔한 일로 시비가 벌어지고, 남편과 기사가 벌이는 폭력적인 광경을 불안하게 지켜보던 경숙은 혼잣말을 계속한다. 콜센터에서 일하며 세상에서 고립돼 인간성이 말소된 처지에 이른 경숙, 헬멧으로 얼굴을 가린 퀵 기사와 그에게 막무가내로 분노를 표출하는 남편은 불안한 기운과 폭력의 잔해가 떠도는 우리 시대를 형상화한다. 「옥천 가는 날」은 초로의 자매가 아흔 넘어 운명한 어머니의 주검과 함께 응급차에 타고 고향 옥천으로 향하는 과정을 핍진하게 그린다. 생전에 그토록 옥천에 가고 싶어했던 어머니의 소망을 들어드리지 못한 미안함 그리고 보조금을 타내고자 멀쩡한 어머니를 치매 환자로 둔갑시켜야 했던 데 대한 회한은 끝내 자매의 통곡으로 마무리된다. 위 두편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자동차 안에서 서사가 진행되는 「막차」에는 며느리가 암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행 막차에 오른 노부부가 등장한다. 이처럼 자동차는 파편화한 가족들을 마치 끈처럼 이어주는 장치로 등장한다. 표제작 「국수」에도 “끈”에 대한 의미심장한 대목이 나온다. 자식이 끈이더라는 말을 친구에게 들은 적이 있어요. 남편과 자신을 이어주는 끈일 뿐 아니라 세상과 이어주는 끈이 돼주더라는 말을요. 일찌감치 결혼해 자식을 넷이나 낳은 친구였지요. 그러고 보니 국숫발이 모양으로만 보자면 끈 같기도 하네요. 혹 당신이 뽑아낸 국숫발들은 끈이 아니었을까요. 당신은 자식이란 끈 대신 밀가루로 반죽을 개어 끈들을 만들어냈던 게 아닐까요.(64면) 화자 ‘나’는 29년 전 의붓어머니가 처음 해주었던 음식인 국수를 반죽하고 만들면서 흘러간 세월을 돌아본다. 자식 딸린 남자의 후처로 들어온 의붓어머니는 남편과 의붓자식들에게 제대로 된 식구 대접을 받지 못한 채 29년 세월을 살아왔다. “빚을 갚는 심정으로 반죽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화자의 말처럼 국수를 만드는 과정은 지난 시간의 응어리를 풀어내는 화해의 과정과 포개진다. 작가는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을 세심한 손끝으로 새로 쓰듯이 고치고 또 고치는 시간을 건너왔다. 등단작을 개작하여 2019년 새로 펴낸 것처럼, 이미 끝이 맺어진 이야기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행위는 김숨의 소설세계와도 맞닿아 있는 듯하다. 이 사회의 가장 외진 곳을 향해 시선을 던지며 약자들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작가는 이 책의 초판 ‘작가의 말’에 썼듯이 누구보다 “성실하게, 한결같이” 소설만을 써왔다. 정성스레 잘 차려진 한끼 식사 같은 소설의 미덕을 한껏 보여주는 이 소설집은 한결같이 성실한 작가의 개성과 깊이를 다시 한번 증명해낸다.

나는 염소가 처음이야

<나는 염소가 처음이야> “염소 해부 실습의 목적을 뭐라고 써야 하지?” 염소, 자라, 벌, 쥐, 노루, 나비… 지정된 자리에서 벗어나 인간의 일상과 환상으로 침투한 동물적 생에 대하여 동물을 테마로 한 여섯 작품의 모음, 『나는 염소가 처음이야』. 김숨이 동물에 천착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첫 소설집 『투견』에서 이미 개와 금붕어와 새가 이 세계를 견디지 못하고 죽어갔다. 축소된 삶을 사는 동물과 언제나 죽음을 먹고 사는 인간, 그러나 김숨의 이번 소설집에서 인간은 동물을 포획/억압하는 데 실패하고 동물은 인간의 시공간을 유유히 가로지른다. “동물들이 인간에 의해 바뀐 전 지구적 환경 안에서 얼마나 강인하게 잔존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들, “동물들에게 김숨의 소설은 그 잔존의 서식지다.”(윤경희, 해설에서) 수벌 대가리가 땅으로 떨어질 때 까막산 여기저기서 노란 송홧가루가 폭죽처럼 터졌다. 수벌의 최후를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종족 번식을 위해 태어난 운명으로, 수벌에게는 교미 말고 어떤 의무도 주어지지 않는다. _「벌」에서 수벌은 교미 철이 지나면 꽃이 다 진 들판에서 자신보다 작지만 사나운 일벌에게 쫓겨 죽음을 맞는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끔찍한가? 생각해보니 자신들이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염소의 생명은 그만큼 연장되는 셈이었다. 그러니 염소로서는 자신들이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좋을 것이었다. 그는 그러나 그것이 염소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어차피 해부 실습 교재로 쓰일 염소일 테니까. 그러지 않은 염소들도 결국은 때가 되면 도축되어 엑기스로 만들어 지거나 음식으로 요리되어 인간의 입으로 들어갈 것이었다. _「나는 염소가 처음이야」에서 염소 해부 실습을 앞둔 ‘그’는 혹시라도 염소 피가 스며들까 두려워 해부용 라텍스 장갑을 세 장이나 겹쳐 낀 채 생각한다. 어떤 염소가 올까. 암컷은 새끼를 낳아야 할 테니 안 될 것이다. 아니, 새끼를 못 낳게 된 늙은 암컷이 올 수도 있다. 염소의 수명을 아는가? 좀더 가까운 돼지의 수명은 어떤가? 돼지는 대개 생후 오륙 개월, 고기로 가장 인정받는 110kg이 되면 도축장으로 끌려가므로 수명을 다하고 죽는 돼지란 오히려 낯설다. 상기한 인용문에 의하면 염소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이런 염소의 최후는 어떠한가. 쥐잡기 전문가들이라고 불렀으나 “한순간 무시무시하고 치명적인 무기로 돌변할 수도 있는 도구를 하나씩 손에 들고 있는 남자들”(「쥐의 탄생」)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니 쥐보다 그들이 더 무서운 것은 왜일까. 자라요리 전문 식당을 하는 엄마가 자라 대가리를 하나라도 더 자르면 자신이 사달라는 것을 사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식칼로 자라 대가리 내려치는 것을 좋아했다는 아들에게 느껴지는 생경함, 음울한 저수지에서 자꾸만 마주치는 자라보다 더 두려운 생경함이다.(「자라」) “심장이 뛰고 있었다는군!” “글쎄, 심장이 뛰고 있었대!” “심장이 뛰고 있었다지 뭐야!”(「나는 염소가 처음이야」)처럼 마치 부조리극을 연상시키는 대화의 반복과 거기서 느껴지는 무신경함 또한 마찬가지다. 한겨울 야밤에 노루 사냥을 떠난 일용직 노동자들과 어린아이 하나. “노루 모가지를 따자마자 우리 은섭이 입에 제일 먼저 흘려넣어주어야 해요. (…) 우리 은섭이처럼 어리고 순한 노루 피면 좋을 텐데”라며 “시뻘건 막국수를 나무젓가락으로 건져 암홍색 립스틱을 짙게 칠한 입으로 가져”가는 아이 어미의 붉은 입을 바라보는 덴 용기가 필요할 것 같다.(「피의 부름」) ‘별빛농원’의 강사는 포충망 속 제비나비의 가슴 부분을 엄지와 중지로 누른다. 우두둑 소리가 그의 귀에 들릴 정도로 제법 크게 난다. “가슴근육을 파괴시키는 거예요.” 보조개 팬 얼굴로 웃는 그의 손에 들린 제비나비를 아이가 무서워하자 아이의 보호자가 말한다. “우리 애가 겁이 많아서”라고. 연약한 동물을 포획해 살상, 관상(觀賞)하는 법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에 기대하는 교육적 효과는 무엇인지.(「곤충채집 체험학습」) 살아 있는 많은 존재의 생사를 인위적으로 관장하는 인간들은 어떤 동물들 위에는 군림할지 모르나 인간 종 서로에게 갖는 공포와 본능적인 불안감에서는 끝내 자유롭지 못하다. 인간이 지정한 자리에서 벗어나 인간의 일상과 환상 속에 침투해 들어온 동물들의 ‘자연스러움’이 외려 인간 내면 깊숙한 곳의 그로테스크함을 환기한다. 소설집을 다 읽고 나면 다음 문답의 아이러니가 기이한 잔상처럼 남을 것이다. “염소 해부 실습의 목적을 뭐라고 써야 하지?” “그거야 생명의 존엄성을 깨닫는 거라고 쓰면 되지.” _「나는 염소가 처음이야」에서

당신의 신

<당신의 신> “당신의 신이 되기 위해 당신과 결혼한 게 아니야.” ‘우리’라는 폭력적 명명이 아닌 ‘나’와 ‘너’로 온전히 존재하기 위해, 그녀는 쓴다. 『당신의 신』에는 「이혼」 「읍산요금소」 「새의 장례식」 세 편이 묶였다. 첫머리에 놓인 「이혼」은 김유정문학상, 황순원문학상 후보작에 오르며 평단의 주목을 받은 작품. 이혼을 앞둔 ‘그녀(민정)’와 남편 ‘철식’을 중심으로 다양한 결혼생활의 양태가 펼쳐진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다양한 양태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고통받는 여성의 목소리가. 평생 남편의 무시와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아이 셋을 낳고 오십삼 년을 함께 산 민정의 어머니. “스스로가 이혼을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조차 판단할 수 없는 지경까지 어머니가 가버렸다는 걸. 자신의 기분과 감정이 어떤지조차 모르는 지경까지 어머니가 가버렸다는 걸” 알게 된 민정은 절망하지만, 결국 지긋지긋한 부모로부터 도망치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죽는 날까지 지속적인 학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남편과의 이혼이 이천 명이 넘는 신도들과의 이혼이기도 해서. 모태에서부터 믿은 신과의 이혼이기도 해서” 남편과 헤어지지 못한 목사 사모도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탈하나 뒤틀린 채 곪아가는 부부도 있다. ‘최’와 ‘최의 아내’이다. 아내가 “맏며느리로서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고, 시아버지 병시중까지 마다하지 않”는 동안 남편은 여자 문제로 아내를 고통스럽게 했다는 것을 민정은 안다. 그러나 ‘최의 아내’는 “우리가 이해해줘야지 어쩌겠어요. (…) 우리 아내들 말이에요. (…) 남편이 아니라 아들이라고 생각하면 너그러워져요”라며 애써 태연한 척 민정에게 이야기한다. ‘우리’라 묶어 말해버리지 않으면 감당하기 어려운 ‘최의 아내’의 속내를 짐작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혼 후 추문에 휩쓸려 해고당한 민정의 선배 영미. 소문의 당사자 남녀 둘 중 영미만 해고되었고 상대 남성에게는 그 소문이 “구두 밑바닥에 들러붙은 껌이나 양복바지에 튄 구정물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민정은 뒤늦게 깨닫는다. “이혼으로 한 차례, 추문으로 또 한 차례 길바닥에 내팽개쳐”진 영미의 이미지. 학습지 교사로 일할 때건, 감자탕집에서 음식을 나를 때건 ‘이혼녀’라는 사실은 낙인처럼 따라와 영미를 절망시켰다. “자다가 새벽에 눈이 저절로 떠지면 여자로서만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끝났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더라”는 영미의 말, 어쩌면 민정이 마주할 미래일지 모른다. 그러나 민정은 이혼의 뜻을 굽히지 않는다. 깊은 밤 철식에게 만두를 쪄주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는 있으나 ‘자신과 가장 가까운 존재의 고통에는 무감각한’ 철식과 함께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영혼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비난”을 들을지라도, 더는 ‘우리’라는 말로 그와 묶일 수 없다. “나는 당신의 신이 아니야.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찾아온 신이 아니야. 당신의 신이 되기 위해 당신과 결혼한 게 아니야.” _「이혼」에서 민정은 어째서 이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 민정에게 이혼은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이다. 삶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되는 통과의례. 민정은 이혼이 자신과 철식에게 불행이 아니기를, ‘우리에게’가 아닌 ‘나’와 ‘당신’에게 불행이 아니기를 바란다. 뒤이어 만나게 될 「읍산요금소」의 요금소도 통과의례의 상징이라 볼 수 있다. 이혼 후 친권도 포기한 ‘그녀’가 일하는 곳. 그녀는 부스 안, 폐쇄된 공간에서 가족도 연인도 없이 혼자 지낸다. 읍산요금소를 지나면 바로 햇빛요양원이고 이어서 화장터와 납골당이 있다. “부스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늙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까지” 그곳에 앉아 있는 그녀, 자신의 삶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잘 알 수 없는 채 그녀는 도로에 석양이 깔리는 것을 지켜본다. 미발표작인 「새의 장례식」에서는 남성 화자의 목소리를 만날 수 있다. 아버지의 폭력 성향을 물려받아 ‘그녀’를 폭행했던 ‘나’, 결국 ‘나’와 이혼한 뒤 ‘그녀’가 재혼한 ‘그’. 소설은 나와 그, 두 사람의 만남을 담았다. 이혼하고 두 사람의 관계가 끊어졌다 해도 삶은 이어진다. 현재의 그녀를 만드는 데 전남편의 영향이 없을 수 없고, 현남편인 그는, 그녀와 내가 부부였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한다. 그래야 그녀가 겪는 불안 증세를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과연 그는 그녀를 좀더 이해하게 될까, 나는 그녀와의 시절을 이제라도/이제야 온전히 끝낼 수 있을까. 이혼이라는 통과의례를 앞두거나 겪고 난 김숨의 그녀들. 낯설지 않은 얼굴들, 최근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이 ‘이슈화’되면서 수면 위로 더 많이 드러난 얼굴들. 사회/제도적 굴레에서 완벽히 자유로울 수 없고 구원의 가능성은 희미하지만, 그녀들이 ‘우리’라는 폭력적 명명이 아닌 ‘나’와 ‘너’로 온전히 존재하길 바라며 작가 김숨은 쓰고 또 쓴다.

너는 너로 살고 있니

<너는 너로 살고 있니> 전작으로 쓰여진 편지 형식의 미발표 소설 ‘한결같지만 다른 숨’ 김숨 소설의 새롭고도 아름다운 성취 한결같지만 다른 숨, 편지소설 『너는 너로 살고 있니』로 다시 김숨이 찾아왔다.『너는 너로 살고 있니』는 작가의 믿음직한 행보에 또 하나의 이정표가 될 만하다. 고대의 능이 삶의 고락을 가로지르는 도시 경주로, 한 번도 주인공이 된 적 없는 무명의 여자 배우가 11년째 식물인간 상태인 한 여자를 간호하기 위해 깃들며 시작되는 이 소설은 560여 매가량의 편지 형식이다. 살아 있어도 죽은 듯 삶을 영위했던 ‘나’와 죽어 있으나 여전히 살아 있는 듯한 ‘그녀’가 교감하는 이야기들, 병원을 둘러싼 그 속의 다양한 인간 군상의 이야기들이 작가 특유의 문체로 촘촘히 수놓인다. 삶과 죽음, 젊음과 늙음, 육체와 정신, 여성성의 문제들이 9개의 장으로 나뉘어 온전한 ‘나’를 찾아가는 과정에 관한 은유로서 한 편의 산문시처럼 아름답게 펼쳐진다. 특히 주목받는 신예 화가 임수진은 목판화가 주는 질감과 색채로 이 책의 예술성을 한껏 드높였다. 24점에 달하는 목판화들은 특유의 서정으로 소설이 구현한 상상력을 극대화, 풍부한 미적 쾌감을 선물한다.

바느질하는 여자
5.0 (1)

<바느질하는 여자> 손가락이 뒤틀리고 몸이 삭도록 바느질을 하는 여자와 그 속에 투영된 소설 짓는 여자-김숨 절대고독 속에서 숨 막힐 듯 써 내려간 책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이상문학상 수상 작가 김숨의 일곱번째 장편소설 2013년 대산문학상에 이어, 2015년 이상문학상의 영예를 안은 작가 김숨의 일곱번째 장편소설 『바느질하는 여자』가 출간되었다. 3센티미터의 누비 바늘로 0.3밀리미터의 바늘땀을 손가락이 뒤틀리고 몸이 삭도록 끊임없이 놓는 수덕과 그녀의 딸들이 ‘우물집’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한 자 한 자 새겨 2천 2백 매의 장편소설로 완성했다. “누비는 똑같은 바늘땀들의 반복을 통해 아름다움에 도달하지. 자기 수양과 인내, 극기에 가까운 절제를 통해 최상의 아름다움에 도달하는 게 우리 전통 누비야. 다른 어느 나라에도 없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고유한 침선법이지”라고 되뇌는 소설 속 인물의 말처럼,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지루한 인생에서 아름다움에 이르는 길이 이 소설 안에 펼쳐져 있다. 바느질하는 여자와 소설 쓰는 여자 김숨. ‘명장’을 증명하지 못할지라도 삶을 견디고 살아내는 자신만의 형식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이 아름다운 소설이다. 홈질의 무한반복인 누빔질은 글쓰기를 빼닮았다. 한 땀이 한 자, 백 땀이 백 자. 그러니 서쪽 방에 고립되어 손가락이 뒤틀리고 심신이 삭도록 바느질한 사람은 수덕이 아니라 김숨이고, 절대고독 속에서 숨이 턱턱 막히도록 조밀한 언어로 장편을 써낸 사람은 김숨이 아니라 수덕인지도 모르겠다. 바느질하는 수덕을 죽도록 사랑하면서도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싶어 한 딸들의 마음을 알겠다. 이토록 지독한 글을 쓴 김숨에게 두려움을 느끼지 않기도 어렵지만 중독되지 않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 안의 모든 무늬와 기척들이 침엽수림처럼 세밀한데, 어느덧 우뚝하고 울창하다. 김숨은 바늘의 문장으로 산맥을 창조했다._권여선(소설가) 숨은 명장의 삶 - 이토록 대단한 삶은 무엇으로 증명되나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내는 행위가 예술이라면 금택은 어머니가 하는 누비 바느질 역시 예술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예술이라는 말을 입속에서 중얼거리는 순간 갈비뼈들이 갈라지고 벌어지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심장이 격하게 떨렸다.” ‘바느질하는 여자’로 살기 위해 결혼도 명예도, 또 다른 삶도 포기한 여자들이 여기 있다. 그녀들이 무엇을 포기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아마도 바느질을 제외한 모든 것일 것임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집요하게 한 가지 일에 매진하는 모습, 그것을 통해 궁극에 달하는 모습, 주인공 수덕은 수십 년간 옷을 짓지만 어떠한 과정도 허투루 건너뛰지 않으며 더 속도를 내지도 더 욕심을 부리지도 않는 정도程度에 이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 소설은 다른 무엇도 아닌 자신만의 형식으로 ‘아름다움’을 일군 한 삶의 탐구이며, 이것 자체가 예술의 경지에 이른 것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이것은 예술을 넘어 자기만의 삶을 살아낸 아주 평범한, 어떤 방식으로 증명되지는 않더라도 누군가는 감탄하고 존경해 마지않는 내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웰빙, 힐링을 외쳐대지만 결국 우리 모두는 인생이라는 것에 몸을 바치게 되어 있으며 그것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두껍고 긴 소설을 다 읽어낸 사람이라면 1970년대 이후 현대사를 관통하는 어느 시점을 살아낸 사람들의 아름다운 모습에 어느덧 박수를 보내게 될 것이다. 또한 그 사람만이 자신의 삶 속에 숨겨진 아름다움의 희미한 한 자락을 찾아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김숨의 소설 ― 작법 그리고 기도 “옛 사람들은 옷을 지을 때 한 땀 한 땀마다 입을 사람의 복을 기원했다지. 건강과 장수를 빌면서 정성을 다했다지.” “복이란 게 돌고 도는 거야. 돌고 돌아 자손에게라도 되돌아가는 게 복이야.” 누비 바느질만으로 자신의 긴 인생을 살아내며 두 딸을 먹이고 입힌 수덕은 손가락이 비틀어지고 몸이 굳고 눈이 멀고 정신이 혼돈하는 생의 마지막에 이르게 된다. 그 과정에서 소설은 ‘기도’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나는, 바느질하는 여자가 한 땀 한 땀에 복을 빌어 바느질을 하기 때문에 그 여자에게 옷을 지어 입으면 무병장수하게 된다는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누구도 만지기 싫어하는 시신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혀주고 싸매며 저승 가는 길에 복을 불어넣는 일을 하는 염장이의 딸이 아버지의 덕을 이어받아 복되게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 덕을 빌고 복을 비는 일은 신적인 일이면서 인간만의 고귀한 능력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기도로 태어났을 한 ‘사람’은 어떤 근원이, 어떤 기도가 더해졌을지 몰라 더 깊고 소중한 존재일 것이다. 작가는 옷을 지어 입으러 우물집에 들락거리는 손님들의 다양한 삶을 소설로 지어내며, 똑같이 몸과 손이 곯는 고통스럽고 고독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이렇게 길고 아름다운 소설을 짓는 일, 이러한 시간의 견딤과 그 속에 깃든 ‘기도의 마음’ 모두가 김숨 작가의 작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추운 겨울 날씨 속에 이 길고 아름다운 소설을 선물처럼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책속으로 추가> “우리 할머니 밑으로 친손녀, 외손녀 다 합쳐 손녀가 아홉이나 되었지. 아홉 중 셋째인 내가 유일하게 할머니 바느질 솜씨를 물려받았다고들 했지. 우리 할머니가 홑청을 꿰맨 이불은 매듭 하나 없었단다. 매듭을 일일이 풀어서는 연결을 했지. 매듭짓는 걸 그렇게나 싫어하셨어. 오이씨만 한 매듭을 풀어서 새 실하고 연결하는 걸 보고 있으면 감탄이 저절로 나왔단다. 고생을 하도 해서 생강 같아진 손이 마술을 부리는 것 같았지. 마술이 뭐 별거겠니? 그런 게 진짜 마술이지. 생각을 해보렴. 오이씨가 얼마나 작니? 그 작은 매듭을 손가락으로 풀어 헤친다고 생각해봐…… 재주도 보통 재주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하지.” - 본문 중에서 어머니의 중요한 단골이 된 옥 사모님이 다녀간 날, 금택은 어머니의 눈속눈금자가 성미와 평상시 습관, 버릇, 기질, 자세 역시 재고 가늠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미에도, 습관과 버릇과 기질과 자세에도 치수가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눈속눈금자로만 잴 수 있는 치수가. - 본문 중에서 유행하는 옷이라는 것만으로 그녀는 원피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행이라는 단어가 거슬렸는데, 그 이유가 화순의 영향 때문이라는 것을 스스로 잘 알았다. 경주로 돌아오는 시외버스 안에서 금택은 원피스를 꺼내 살펴보았다. 옷감을 살피던 그녀는 자신도 의식 못하는 새 바늘땀을 살피고 있었다. “마음에 안 들어?” 옆에 앉은 동료가 물었다. “바느질이 허술한 것 같아.” “평생 입을 것도 아닌데 뭘.” 동료가 웃었지만 금택은 따라 웃을 수 없었다. 그녀는 원피스에 얼굴을 묻고 냄새를 맡았다. “휘발유 냄새가 나.” “새 옷 냄새야.” 동료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짓는 누비옷들에서는 말린 고사리나 취나물 냄새가 났다. - 본문 중에서 “……염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제일 먼저 가마솥에 데운 물로 손을 깨끗이 씻으셨지. 한 번 씻고 마는 게 아니라 세 번, 네 번 씻으셨으니까. 염을 하는 동안 당신의 손에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은 죽음을 씻어내기라도 하듯, 손이 닳도록 씻으셨어. 아무도 안 만지려는 시신을 만지는 손이었지만, 우리 아버지 손보다 우아하고 정결한 손을 여태 못 봤어.” [……] “맞다. 염장이 세상에서 가장 천한 일 같지만, 그것보다 확실하게 덕을 쌓는 일도 없다. 죽은 사람이 제 몸을 씻겨주니 고마워 저승 가는 길에 덕을 빌어줄 테고, 자손들은 자신들을 대신해 죽은 제 부모의 몸을 씻기니 고마워 덕을 빌어줄 것 아닌가. 십시일반이라고, 집집마다 쌀 한 줌씩만 모아도 금방 한 가마니가 되지 않나? 평생을 염장이로 살았다고 하니, 염을 얼마나 많이 했을까. 염 한 번 할 때마다 죽은 사람하고 그 자손들이 염장이 아비를 위해 빌어주었을 복이 모이고 모여 고스란히 정인한복 여자에게 갔을 테니 그 복이 얼마나 크겠나?” “조상은 죽어 흙으로 없어져도, 조상이 살아생전에 쌓은 덕은 안 없어진다. 자손들 중 하나는 반드시 그 덕을 보게 되어 있다.” - 본문 중에서 어머니는 여전히 0.3에서 0.5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바늘땀을 반복해서 떠 넣어 옷을 지었다. 바늘땀의 길이와 간격은 조금도 늘어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20년을 넘게 누비옷을 지었지만, 누비저고리를 한 벌 짓는 데 드는 시간은 거의 동일했다. 바늘땀을 떠 넣는 데 드는 시간은, 그리고 한 벌의 누비옷을 짓는 데 필요한 시간은 단축되지 않았다. 어머니가 짓는 누비옷은 정해져 있었고, 달라지지 않았다. 어머니가 가장 최근에 지은 누비저고리는 10년 전, 20년 전 지은 누비저고리와 다르지 않았다. 어머니는 여전히 두 달에 한 번 버스를 타고 대구까지 나가 옷감을 떼왔고, 자연에서 구한 재료로 손수 염색을 했다. 염색을 할 때는 우물물을 쓰는 원칙을 고수했다. - 본문 중에서 오전 내내 누비대 앞에 꿈쩍 않고 앉아 바늘땀을 뜨고 난 어머니의 눈은 멀어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바늘땀을 뜨고 나면 어머니의 눈은 어둠과 빛을 구분하지 못할 할 만큼 멀어 있었다. 멀어버린 눈이 돌아오면 어머니는 다시 바늘땀을 떴다. 금택은 문득 어머니의 멀어버린 눈이 돌아오지 않을까 봐 걱정되었다. - 본문 중에서 그녀의 바늘에 대한 집착이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위험한 수준이라는 것을 깨닫고 금택은 놀랐다. 어머니는 바느질하는 여자로 살기 위해 자신이 포기해야 했던 것 들에 대해 딸들에게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금택은 어머니가 바늘을 통해 얻은 것들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어머니는 바늘을 통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많은 것들을 얻었다. 쌀을, 소금을, 깨를, 밀가루를, 석유를…… 그것은 부령할매도, 한복 거리의 바느질하는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들은 바늘로 먹을 것을 구하고 자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재숙이 바늘로 얻으려 하는 것은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니었다. - 본문 중에서

철

<철> 철에 장악된, 지난 날의 녹슬어버린 자화상 ‘철’로 상징된 산업사회 이면의 어두운 기억 한 페이지를 차근차근 적어 내려간, 불편하지만 눈을 뗄 수 없고 아프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지난날의 자화상이다. 거대한 철선의 완성을 위해 평생을 노동에 힘쓰는 조선소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 오로지 철선의 완성을 위해 도구처럼 쓰이다가 마모되고 쓸모없어지면 가차 없이 버려지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이미 지나가버린 한 시대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때를 기억하는 이들과 여전히 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기에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첫번째 장편소설 『백치들』을 통해 70년대에 돈을 벌기 위해 멀리 중동의 모래사막으로 떠났다가 돌아온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저자는, 두번째 장편소설 『철』로 나날이 변화하는 사회 안에서 하나의 부속품처럼 살아야 했던, 철저하게 이용되다가 마모되어 쓸모없어지면 가차 없이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었던, 그 시기의 아버지를 작품속으로 불러내었다. 그리고 노동으로부터 소외되고 결국 자기소외된 우리의 가족과 이웃 그리고 친족의 얼굴 없는 삶을 자본과 노동 그리고 계급의 문제로 짱짱하게 조여서 그려내고 있다.

나의 아름다운 죄인들

<나의 아름다운 죄인들> 일곱 살의 동화(冬花)는 할머니 댁에 맡겨지고, 백 밤이 지나면 데리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 아버지는 좀체 연락이 없다. 1980년대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 할머니 댁에는 내 이름(동화)을 토해놓고 중풍에 쓰러진 할아버지가 골방에 누워 있고, 양은대야 공장에 다니는 춘자 고모는 공장장과 바람이 나 밤늦게야 들어온다. 그리고 까도 까도 끝없는 마늘을 쏟아놓는 할머니는 내게 도망간 엄마를 닮았다고 말한다. 스스로를 ‘마늘 독보다 더 독한 년’이라고 여기는 내 눈에 추부 사람들은 모두들 자신의 나약함을 감추기 위해 가장 가까운 존재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또한 그 업보를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듯하다. 방앗간 기계에 한 팔을 잃은 ‘방앗간 할머니’는 아들의 간청에도 방앗간을 팔지 않으려 하고, 간질병을 앓으면서도 형의 담배농사를 지어야 하는 ‘장대 아저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발작을 일으키면서도 마을 아이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다. 그리고 아이를 낳지 못해 시댁에서 쫓겨난 뒤 구멍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옥천 할마’는 자신이 전생에 황후였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고, 트럭에 치여 비명횡사한 아들의 보상금으로 금니를 해 넣은 ‘인자 아줌마’는 찢어지게 가난한 중에도 아들을 산 처녀와 결혼시킬 생각을 품고 있다. 개조한 축사에는 양은대야 공장에서 일하는 외지인들이 들어와 불안한 삶을 이어가고, 좀처럼 희망을 찾을 길 없는 청년들은 자신들만의 축제를 벌이고, 열여덟의 나이에 아이를 밴 ‘정희 언니’는 아이가 죽어버리기를 바란다. 사랑의 상처, 인생의 좌절, 그리고 도무지 어쩔 수 없는 절망감들을 지닌 채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어린 동화의 눈에 ‘죄’를 짓고 살아가는 것처럼만 보이는데……

침대

<침대> 잔혹한 삶에 바치는 몽환적인 레퀴엠 그로테스크한 은유로 매혹의 판타지를 펼쳐 보이는 작가 김숨의 새 소설집 『침대』 세계를 측량하려는 욕망은 세계의 본질에 가닿으려는 욕망이다. 이것은 기하학을 낳는다. 욕망의 선들이 모여드는 소실점의 끝에서 김숨이 걸어오고 있다. 가장 간결한 형식으로, 복잡해 보이는 사물들이 사실은 점, 선, 면으로 이루어진 입체들이라고 알려준 기하학자들이 있었다. 실타래가 뒤엉킨 듯 실체를 알 수 없는 현실이 사실은 인물, 행동, 시공간으로 이루어진 방이라고 알려주는 언어의 측량사가 있다. 그녀가 김숨이다. _허윤진(문학평론가) 냉정한 묘사를 통해 절망적인 현실을 잔혹한 이미지로 탁월하게 그려내는 젊은 소설가 김숨의 두번째 소설집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올해로 등단 10년째를 맞이한 김숨은 2005년 첫 소설집 『투견』을 발표한 이후, 지난해 장편소설 『백치들』, 이번에 출간된 『침대』까지 최근 3년 동안 한 해에 한 권씩의 책을 발표하며 왕성한 작품 활동으로 자신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서사보다 이미지를 부각시키며 시적인 소설쓰기를 보여주었던 김숨의 작품들은, 변화하는 한국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케 하는 데에 모자람이 없다. 기존의 소설들과 확실하게 구분되는 자신만의 독특한 소설 세계를 구축했던 그의 작품들은 주로 ‘잔혹’ ‘그로테스크’로 압축되어 설명되었다. 이를 뒷받침하듯 문학평론가 강유정은 김숨의 첫 소설집에 대한 평을 “김숨의 소설은 잔혹하다”(『오이디푸스의 숲』)라는 말로 시작한 바 있다. 가능성 자체가 봉인되어 있는 잔혹한 세상에서 김숨이 조형해내는 소설적 공간은 잔혹성 그 자체를 강조하는 고통스러운 이미지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마치 잔혹해지는 것만이 지독한 삶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듯 음습하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을 끌어들이는 김숨의 소설은, 삶을 존재의 덫으로 보는 시각 면에서는 소설의 오래된 관습이자 생래적 운명에 가깝지만, 그로테스크한 현실의 이미지가 잔혹한 현실의 이미지 그 자체에서 시작하고 끝난다는 점에서 이전의 소설적 전언과 구별되며, 이것은 또한 자폐적인 자아의 내면묘사가 주류를 이루었던 90년대 이후의 소설적 흐름과 결별하는 김숨만의 고유한 특성이라는 것이 강유정씨의 설명이었다. 그리고 김숨의 소설에 대한 그의 비평은 “끔찍한 세상의 잔혹함보다 더 잔혹한 이미지로 재구성함으로써 김숨은 세계의 잔혹성을 견뎌나갈 우주적 잔혹성을 창조해낸다. 환상이 멸한 이후, 환멸의 공간 너머에서의 소설, 그러니 김숨의 소설 그 세계는 더욱 잔혹해져도 좋을 것이다”라고 끝을 맺는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2007년 현재, “더 잔혹해져도 좋을” 김숨의 두번째 소설집, 『침대』가 나왔다. 삶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되, 감정을 철저하게 배제한 채 서술되는 건조한 문체는 김숨의 작품이 가진 또 하나의 힘이다. 조그만 불씨에도 강렬한 힘으로 거침없이 제 몸을 태우는 잘 마른 나무처럼, 김숨의 건조한 문체는 그 안에 불을 품고 있는 듯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의 소설에서 보여지는 낯선 인물들과 사건, 시공간이 매혹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물 같은 인물들, 인물 같은 사물들 『침대』라는 표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번 소설집에서는 일상의 사물들의 이미지가 두드러진다. 식탁(「409호의 유방」), 침대(「침대」), 소파(「손님들」), 책상(「박의 책상」), 서랍장(「두번째 서랍」), 항아리(「쌀과 소금」) 등이 그것인데, 이러한 사물들은 사물보다 더 사물 같은 인물들과 함께 정적이면서도 음습한 작품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또한 주로 가구의 형태를 하고 있는 그것들은 갇혀진 공간 안에 붙박인 인물들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철거가 예정된 듯 모두가 떠난 아파트에서 식탁에 앉아 오후 두 시에 방문하기로 한 관리인을 기다리는 늙은 부부(「409호의 유방」)의 모습이나 ‘그들’에 의해 이십여 년을 병실에 감금된 채 침대를 지켜야 했던 노파(「침대」), “당신의 집을 지키기 위해” 왔다며 4인용 소파에 한 자리를 비워둔 채 정물처럼 앉아 있는 손님들(「손님들」)과 회사 측의 사직 권고에도 끝까지 자신의 책상을 지키는 박계장(「박의 책상」)의 모습은 각각의 작품에서 그려진 식탁과 침대, 소파와 책상처럼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어왔기 때문에 더는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없는 사물, 그 자체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한편 닫혀져 있어 알 수 없다는 불안 때문에 삶을 송두리째 집어삼키는, 그러나 결국엔 텅 빈 공간일 뿐인 잠겨진 빈 서랍장(「두번째 서랍」)과 채우는 삶에서 비워지는 죽음을 상징하는 쌀과 소금이 담긴 항아리(「쌀과 소금」) 역시 인물들의 삶을 형상화한 상징이자 인물 자체의 모습으로 비춰지기는 마찬가지이다. 문학평론가 소영현은 “김숨 소설의 무심하고 건조한 분위기가 인물이 정물로 환치되는 이런 방식과 연관된다”고 보고 있다. “사물이 된 인물들은 타인의 내면이나 심리를 엿보지 못하고, 인물들 사이에서 이해나 소통의 가능성도 절멸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김숨의 소설이 대체로 고백이나 독백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내면을 드러내지 않고, 주관화된 진술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관찰자적 시선만이 유지되는 것, 판타지적 요소가 활용”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주관적 의식에 의존하는 고백(/독백) 형식이나 판타지의 요소를 활용하면서 존재의 물화를 표현하고 극단적 인간 소외를 표현해”내는 것, 그것이 바로 사물과 인물의 경계를 허무는 김숨의 작품의 큰 특징이자 이번 소설집에서 더욱 도드라져 나타나는 그 작품만의 매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낯선 자들이 찾아온다! 홀로 남겨진 공간과 시간, 그리고 그것들이 불러일으키는 공포가 몇 편의 소설을 쓰게 했다. 이번 소설집에는 그 소설들이 묶였다. _「작가의 말」 중에서 김숨의 첫 장편소설 『백치들』의 축약본이라고 할 수 있는 「트럭」을 제외하고, 이번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을 아우르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낯선 자들의 방문이라 할 수 있다. 끝내 오지 않는 관리인, 침대를 지키게 한 그들, 집을 지켜주겠다며 오히려 집을 점거해버린 손님들, 직업적인 이유로 갑자기 나타나 책상을 들어내는 관리부 직원들, 한때 소홀히 대해서 나를 떠나갔던 가축들까지…… 그리고 그들의 방문은 인물들의 행동과 삶을 결정한다. 김숨은 어린 시절부터 홀로 남겨진 집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고 작가의 말을 통해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낯선 자들이 담을 타고 넘어와 자신을 점령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이다. 그리고 이러한 불안과 공포는 그의 작품 안에서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의 옷을 입고 전혀 다른 판타지적 공간을 펼쳐 보인다. 이제 『침대』를 통해 김숨 소설의 낯선 인물들이 다시 한 번 독자의 방문을 두드린다. 당신은 문을 열 준비가 되었는가? 그 문을 여는 순간, 매혹적인 상상력이 소설을 읽고 있는 당신을 순식간에 점령할지도 모를 일이다.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 아직 끝나지 않은, 일본군‘위안부’ 그 세 번째 이야기! “개인의 기억에서 공동체의 집단적 기억으로” 2016년 8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현재와 과거를 조명한 『한 명』, 2018년 7월, 위안소에 살고 있는 임신한 열다섯 살 소녀의 삶을 그린 『흐르는 편지』에 이어 김숨의 ‘위안부’소설 그 세 번째로 ‘위안부’피해자의 직접 증언을 바탕으로 한 소설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 두 권을 선보인다. 이 두 소설은, 현재 살아 있는 분들 가운데에 길원옥, 김복동 두 할머니의 증언을 토대로 쓴 한 나라의 불행한 역사의 이야기이며, 꽃다운 나이에 삶을 통째로 유린당한 인간의 처절한 생존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1인칭 소설로 화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한 작가의 의도는, 이 생에서 그 어느 것도 누리지 못한 채, 고통의 세월에서 상흔의 부적만 겨우 간직하고 살아남은 자 ―이미 늙고 병든 이―의 증언의 형식보다 더 강력한 리얼리티로 생생한 현장성을 발휘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껏 선명하게 기억하는 허약했던 나라의 역사, 그 치부를 말하는 호소력 있는 목소리는 나라를 위해 그들이 치룬 무차별적인 희생에 대한 무관심과 냉혹한 시선을 사실감 있게 전달한다. 나아가 삶을 이해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 연민이 없는 사회의 굴곡진 현 사회의 모습까지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제야말로 아픔을 공감한다는 것과 함께 이들의 헌신과 늦었지만 이들이 느낄 수 있을 살아 있음의 기쁨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는 것을 이 소설들은 그렇게 살아 있는 목소리로 들려준다. 홀로–여럿의 주체가 된 삶이자, 역사 폭력의 역사 속에 묻혀버린 한 존재의 경험과 기억 8월 14일 기림일에 맞추어 출간된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의 화자 김복동은 열다섯 살에 군복 만드는 공장에 가는 줄 알고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다시 대만, 광동, 홍콩, 수마트라,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지로 끌려다니며 ‘위안부’ 생활을 하게 됐다. 그러다 스물두 살에 싱가포르에서 해방을 맞았고, 자신을 찾아온 이종 형부를 따라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가면 모든 것이 잘될 줄 알았던 김복동 앞에 놓인 현실은 그러나 녹록하지 않았다. 농사일도 마다하지 않았고, 함바집, 횟집 등에서도 험한 일을 하면서도 새벽마다 절을 찾았다. ‘위안소’에서 맞은 606호 주사 탓에 불임이 될 줄도 모르고 아이를 갖게 해달라 끝없이 기도했다. 자신의 잘못도 아니면서 죄책감 때문에 마음 놓고 남자를 사랑할 수 없어 37년이나 함께 산 남자가 있었음에도 평생 혼자 산 것만 같다고 말하는 그녀는 ‘위안부’로 농락당하고 훼손된 자신의 7년의 세월이 이후 자신의 삶을 ‘혼자’인 것으로 만들었다 말한다. 김복동은 평생 외로웠고 평생 쓸쓸했다. 결국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해 예순두 살에 ‘위안부’로서의 삶을 고백했으나 이후 그녀에게 찾아온 것은 가족들의 외면이었다. “내가 나를 찾으려고 하니까 큰언니가 말렸어. 조카들 생각해서라도 제발 가만히 있으라고 했어. 그래도 나를 찾고 싶었어. 예순두 살에 나를 찾으려고 신고했어. 신고하고 큰언니가 발을 끊었어. 우리 아버지, 엄마 제사 지내주는 조카들까지. 나를 찾고, 더 쓸쓸해졌어.“ “다 같이 살고 싶어……. 밭도 일구고, 논을 사서 벼농사도 짓고……. 그런 공상을 할 때는 죽음이 멀리 달아나.” 국가가, 사회가, 우리가 침묵한 탓이었다. 개인의 소중한 삶이 폭력의 역사 속에 묻혀버리도록 방기한 결과이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지 않으니 가족마저 외면했던 것이다. 이미 김복동은 스물세 살 때 『전생록』을 가졌다는 할아버지를 찾아가 물은 적이 있다. 자신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고통을 받는 것인지. 할아버지는 김복동이 전생에 옥황상제의 딸이었고, 자식을 다 죽인 벌로 먼 땅으로 쫓겨났다고 이야기한다. “이해할 길이 없었어. 전생이 아니면, 전생에 지은 죄가 아니면, 내가 겪은 일들을.” 김복동은 전생에서 답을 구했다. 전생으로 둘러대지 않고서는 현생에서 벌어진 일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는 박제가 된 역사 속의 한 장면이 아니다. 그들이 평생에 걸쳐 혼자 묻고 혼자 답해온 것을 이제는 국가가, 사회가, 우리가 함께 묻고 답해야 한다. 그러자면 우선 폭력의 역사 속에 묻혀버린 한 존재의 경험과 기억을 되살려내야 한다. “다들 모른다고 말해도 나는 알아. 내가 겪은 일을 나는 알아. 잊은 적 없어.” ■ 작가의 말 중에서 연초 김동희 선생님과 만났습니다. 김복동 할머니께서 많이 편찮으신데, 더 나빠지시기 전에 할머니의 삶을 글로 남기고 싶다는 간곡한 바람을 제게 털어놓았습니다. 20년 가까이 일본군‘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동고동락하며, 그분들이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했던 권리와 존엄성 회복을 위해 성실히 활동가로 살아온 그녀였습니다. 자신에게 피를 나누어준 친할머니가 편찮으시기라도 한 듯 그녀는 눈과 코가 빨개지도록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증언 활동을 그 누구보다 열심히 해오신 할머니께 서 지금껏 들려주지 않으셨던 이야기를 끌어내 소설이라는 그릇에 담아보자, 김동희 선생님의 눈가장에 고인 눈물을 바라보며 저는 약속을 하고 말았습니다. 처음 찾아뵌 날, 할머니는 항암약을 드시고 홀로 누워 싸우고 계셨습니다. 자신의 육체와 영혼과 기억과……. ■ 작품해설 중에서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는 일본군‘위안부’ 피해 진상규명과 책임 규명을 위해 평생 싸워온 김복동의 이야기를 소설가 김숨이 묻고 답하고 기록하는 과정을 거쳐서 소설로 창작한 작품이다. 자신의 삶을 구술하는 이는 통상 ‘내 삶은 이러이러했다’거나 ‘그때는 저러저러한 일이 있었지. 그랬던 것 같다’라고 진술한다. 부정확한 기억이나 모호한 사실 관계가 있게 마련이지만 구술자는 자신이 회고하는 자기 자신의 삶의 주인이고 그런 의미에서 주체가 된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구술하는 김복동의 방식은 그런 의미의 주인 됨이나 주체 자리와는 다른 모습이다. (……) 왜 이런 주체 양태가 나타나는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물음’ 때문이다. ‘왜 그런 일이 있었을까’ ‘왜 내게 그런 일이 생긴 것인가?’ ‘그 일을 피할 수는 없었나?’와 같이 자신이 겪은 폭력의 원인과 이유를 묻는 물음 말이다. — 권명아, 「작품해설」 중에서

한 명

<한 명>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실제 증언을 재구성하여 완성해낸 <현대문학상> <대상문학상> <이상문학상> 수상작가 김숨의 아홉 번째 장편소설 끝나지 않은 일본군 위안부의 아픔 역사의 이름으로 파괴되고 훼손된 그 ‘한 명’으로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이상문학상> 등 국내 주요 문학상을 연달아 수상하며 평단과 독자의 고른 호평을 받아온 작가 김숨의 아홉 번째 장편소설 『한 명』이 출간되었다. 그동안 여성, 노인, 입양아, 철거민 등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계층을 집중적으로 탐구해온 작가는 인간 사회의 그림자와 분열의 조짐을 그 특유의 집중력 있는 세심하고 예리한 시선으로 천착해 매 작품마다 탄탄하고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선보여왔다. 이번 새 장편 『한 명』은 지난 30여 년간의 ‘위안부’ 문제를 이슈화하는 동시에 그간 한국문학이 잘 다루지 않았던 ‘위안부’ 문제를 본격적인 문학의 장으로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20만 명이 강제 동원되었고 그중 겨우 2만 명만이 살아 돌아온 위안부의 존재는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시작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238명의 위안부 피해자가 공식적으로 등록이 되었으며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은 반세기 동안 감춰져 있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을 세상에 드러나게 한 촉매가 되었다. 그 뒤 전국의 위안부 생존자들이 침묵을 깨고 연달아 고백을 쏟아내면서 ‘위안부’ 문제는 한일 간의 청산할 쟁점으로 부상되었다.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의 증언, 기억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2016년 현재, 그분들 중 40명만이 생존해 있을 뿐이다. ‘피해를 증언할 수 있는 할머니들이 아무도 남아 계시지 않는 시기가 올 것이므로 소설을 통해 그런 점에 경각심을 가지게 하고 싶고, 그것이 문학의 도리라 생각한다’며 집필 동기를 밝힌 작가는 300여 개에 이르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실제 증언들을 재구성하여 다큐멘터리에 가까울 정도로 치밀한 서사를 완성시켰다. 리얼리티를 극대화시킨 소설은 그 시대를 경험하지 못했던 독자들에게 역사의 잔혹성과 내상을 고스란히 실감하게 만든다. 아울러 이 소설은 ‘일본군 위안부’라는 고통스러운 경험과 사건이 주는 충격과 함께 살아남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그녀들의 ‘그 이후의 삶’까지도 조명한다. “인간으로서 기품과 위엄, 용기를 잃지 않은 피해자들을 볼 때마다 감탄하고는 한다”고 말하는 작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 역사가 지워버린 과거를 복원해내며 다시는 반복되어서도, 잊혀서도 안 될 기억의 역사로 확고히 자리 잡게 한다. * 이 책의 저자 인세와 출판사 수익금의 일부는 (사)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나비기금’으로 기부됩니다.

L의 운동화

1987년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청년 이한열 그의 운동화가 김숨의 문장으로 되살아난다 "L의 운동화는 싸우고 있었다. 살기 위해서. 살고 싶어 하는 ‘의지’가 L의 운동화에 발생한 것이다." 개인의 물건이 시대의 유물로, ‘그날’의 운동화가 되살아난다 김숨 작가의 여덟 번째 장편소설 『L의 운동화』가 출간되었다. 1987년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청년 이한열의 운동화가 복원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김숨은 최근 대산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연달아 수상하며 독자와 평단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다. 2005년 첫 소설집 『투견』을 시작으로 10여 년 동안 김숨은 매해 쉼 없이 소설집 4권, 장편소설 7권을 펴냈다. 전작 『바느질하는 여자』가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써 내려간 소설이라면, 『L의 운동화』는 산산이 부서져 내린 운동화를 한 조각, 한 조각 맞추어 나가며 복원해 내는 작품이다. 이한열은 1987년 6월 9일 연세대에서 열린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한 달 동안 사경을 헤매다 7월 5일 22살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의 희생은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되었고, 국민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는 150만 추모 인파가 모여들었다. 피격 당시 이한열이 신었던 270㎜ 흰색 ‘타이거’ 운동화는 현재 오른쪽 한 짝만 남아 있는 상태다. 시간이 흐르면서 밑창이 100여 조각으로 부서질 만큼 크게 손상되었지만, 2015년 그의 28주기를 맞아 미술품 복원 전문가인 김겸 박사가 3개월 동안 복원하여 현재 이한열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김숨 작가는 김겸 박사의 미술품 복원에 관한 강의를 듣고, 과천에 있는 김 박사의 연구소를 방문해 복원 작업을 지켜본 후, 운동화가 복원되는 과정을 소설로 재탄생시켰다. 『L의 운동화』는 한 개인의 사적인 물건이 시대적, 역사적 유물로 의미를 부여받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미술품 복원 전반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이한열의 생존 당시 이야기와 그의 친구들 및 유가족들의 뒷이야기도 그려졌다. 이 소설은 이한열의 운동화를 통해 한 시대의 슬픔과 고통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 지극히 개인적인 물건이라 할 수 있는 운동화 한 짝이 ‘사적인 물건’에서 시공간을 뛰어넘어 ‘시대를 대변하는 물건’으로 역사적인 상징이 되는 과정을 김숨 작가 특유의 집요하고 치밀한 묘사력으로 세세히 그려내며, 삶과 죽음, 기록과 기억, 훼손과 복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짓밟히고 부서지고 사라진 것들을 되살리고 기억하려는 마음 소설은 마크 퀸의 자화상 「셀프」로 문을 연다. 자기 두상을 모형으로 한 석고 거푸집에 자신의 피를 부어 응고시킨 작품이다. 청소부가 실수로 작품을 보관한 냉동고의 전원 코드를 뽑는 바람에 피가 녹아내려 훼손되었다. 마크 퀸이 죽은 뒤 저 작품이 망실(亡失)될 경우, 저것을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 피는 살아 있는 몸속에서 생성되고 순환하는 오묘한 재료였다. 온도에 따라 변질, 소실되기 쉬운 피를 다급히 수혈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할 경우 그 ‘피’라는 물질을 어디서 구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냥 피가 아니라, 마크 퀸의 피를. 만약 30대 초반에 모은 피로 제작한 「셀프」일 경우 그 당시의 피를 대체할 물질을. 다른 사람의 피가 섞여도 그것을 여전히 그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밖에도 마르셀 뒤샹의 「제발 만지시오」, 피에로 만초니의 「예술가의 똥」, 요셉 보이스의 「죽은 토끼에게 그림을 설명하는 법」, 렘브란트의 「야경」과 「자화상」,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잠이 든 뮤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로댕의 「입맞춤」, 토레스의 「무제-완벽한 여인들」, 다니엘 스포에리의 「덫에 걸린 그림들」까지, 많은 예술 작품들이 언급되며, 실제 미술품 복원 사례들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복원’이란 원래의 상태로 돌이키는 것이다. ‘L의 운동화’를 복원하는 것은 ‘L의 운동화’의 본디 모습 그대로 되살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L의 운동화’의 ‘본디 모습’은 무엇일까. 공장에서 이제 막 생산되어 나온 직후? L이 운동화를 사서 처음 신은 때? 최루탄을 맞을 당시? 작품 속 화자인 복원가는 ‘L의 운동화’를 복원하는 동안 끊임없이 고민한다. L의 운동화를 최대한 복원할 것인가? 최소한의 보존 처리만 할 것인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둘 것인가? 레플리카를 만들 것인가? “내가 복원해야 하는 것은, 28년 전 L의 운동화가 아니다. L이 죽고, 28년이라는 시간을 홀로 버틴 L의 운동화다. 1987년 6월의 L의 운동화가 아니라, 2015년 6월의 L의 운동화인 것이다. 28년 전 L의 발에 신겨 있던 운동화를 되살리는 동시에, 28년이라는 시간을 고스란히 담아내야 하는 것이다.” ‘복원’과 ‘훼손’은 종이 한 장 차이이며, “원작의 상태를 벗어나지 않는 ‘적정한 선’에서 작업을 멈추는 것은 복원가의 역량이자 덕목”이라고 말한다. 그리스 신화의 이아손과 테세우스, 동화 속 「신데렐라」,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등 고대 신화부터 최근 문학 작품에 이르기까지 ‘신발’은 주요한 오브제로 쓰여 왔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도 죽은 아들의 낡은 신발을 발견한 아버지는 신발에 입을 맞추며 울부짖는다. “아가야, 일류셰치카, 귀여운 우리 아가, 네 발은 어디 갔니?” ‘신발을 신고 걸어온 역사’라는 의미의 ‘이력(履歷)’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신발은 그 사람의 역사, 바로 그 사람 자신을 상징한다. 작품 속 ‘L의 운동화’는 “살과 피와 뼈로 이루어진 살아 있는 생명체, 영혼이 깃들어 있는” 물건으로 그려진다. 어릴 때 어머니는 연년생인 형과 내게 유니폼처럼 똑같은 옷을 사 주고는 했다. 한날한시에 똑같은 옷을 사 주는데도 형의 옷이 번번이 먼저 해지는 것을 나는 의아해했고, 습관뿐 아니라 성격과 기질이 그 사람의 옷과 신발과 가방 같은 물건에 고스란히 기록된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았다.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물건들은 그 개인의 기록물이기도 하다는 걸. “물건들은 단순히 물건으로 그치지 않고 인간의 흔적을 간직하며, 우리를 연장시켜 준다.” 작품 속 복원가를 찾아오는 의뢰인들에게 복원이란, 그 물건의 소유자를 되살리는 일이자 애도하는 행위이다. “똑같은 상표의 운동화여도, 옆집 아이의 운동화와 내 아들의 운동화는 다르겠지요. 어떤 여자가 아들의 운동화를 복원해 달라고 복원가를 찾아온다면, 그 운동화가 그 여자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는 특별한 운동화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운동화가 귀한 물건도 아니고, 새 운동화를 얼마든지 사 신길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차마 버리지 못하고, 심지어 운동화 값보다 비싼 값을 치르더라도 그것을 어떻게든 복원해 간직하고 싶어 하는 데는 말이지요. 지극히 사적인 의미와 가치가 저를 설득하거나 매혹할 때, 저는 복원하고 싶은 의지와 욕구를 느낍니다.” 이 작품 속에는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언급된다.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여중생 효순과 미선, 제주4.3사건, 일본군 위안부 사건, 홀로코스트까지. 역사 속에 억울하게 스러져 간 많은 사람들을 우리 기억 속에 되살리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진다. 소설은 7만 8천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가스실에서 목숨을 잃은 폴란드 마이다네크 수용소에 산처럼 쌓인 5만 7천 점의 피해자 신발을 언급하며 끝을 맺는다. “원래는 똑같았을 신발들은, 더 이상 똑같은 신발이 아니었다. 그것을 신었던 사람들에 의해 전혀 다른 신발이 되어 있었다.” 김숨 작가는 이 작품을 일컬어, “‘이한열 운동화 복원’이라는 큰 흐름 속에 있는 소설”이라고 말한다. 조각조각 산산이 부서져 내린 운동화를 복원하듯, 한 조각 한 조각 김숨의 문장으로 숨을 불어넣어 부서진 운동화가 되살아나고, 희미해진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사라져 버린 ‘그’가 되살아나는 기적을 만들어 냈다. “삼화고무에서 나온 흰색 타이거 운동화가, 영문으로 타이거(TIGER)라고 쓴 로고가 붙어 있던 그 운동화가 실은 제게도 있었습니다. 어디 저뿐이겠습니까. 그 시절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운동화를 신고 다녔을까요. 그 운동화가 유행이던 시절이 있었으니까요. 제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제 친구 M도, J도, L도, K도 그 운동화를 신고 다녔습니다. 그러니까 L의 운동화는 저의 운동화이기도 하면서 M과 J와 L과 K의 운동화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운동화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 시절 L의 운동화와 똑같은 운동화가 몇 켤레나 만들어지고 팔려 나갔을까요? 얼마나 많은 이들이 L의 운동화를 신고 다녔을까요? 그 운동화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요?” 최루탄에 쓰러진 L을 부축한 마음, L을 병원 응급실로 옮긴 마음, L의 운동화를 들고 응급실 앞에서 기다린 마음, L이 툭툭 털고 일어나기를 기도한 마음, L의 희생이 헛되지 않기를 애도한 마음, 그를 영원히 기억하려는 마음, 그 마음들…. 그 소중한 마음들이 모여 만들어진 이 소설을 독자들이 읽음으로써 ‘L의 운동화’의 복원은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나는 나무를 만질 수 있을까

<나는 나무를 만질 수 있을까>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 「뿌리 이야기」 수록, 작가 김숨의 존재 3부작 내가 왜 여기에 있는가 내가 왜 없는 게 아니라 있는가 나무들도 스스로에게 묻고는 할까 ― 1997년 등단하여 올해로 작가인생 22년, 조용히 그러나 가열차게 작품활동을 이어온 작가 김숨. 이상문학상, 동리문학상,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허균문학작가상 등으로 문단은 그에 대한 신뢰를 보였고, 모호한 이미지가 두드러지는 소설부터 역사와 현실을 토대로 한 소설까지, 독자는 그를 ‘믿고 읽는 작가’라 부른다. 『나는 나무를 만질 수 있을까』는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중편 「뿌리 이야기」를 비롯, 199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등단작 「느림에 대하여」를 개작한 「나는 나무를 만질 수 있을까」, 1998년 문학동네신인상 당선작 「중세의 시간」을 개작한 「슬픈 어항」 총 3편의 중단편소설을 묶은 독특한 작품집이다.

투견

<투견> 1997년 대전일보에 「느림에 대하여」가, 1998년 문학동네신인상에 「중세의 시간」이 당선,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온 김숨이 첫 소설집 『투견』을 선보인다. 이 작품집에는 표제작 「투견」을 비롯해 「지진과 박쥐의 숲」 「유리눈물을 흘리는 소녀」 등 1997년부터 2005년 사이에 발표한 열 편의 소설이 실렸다. 세계와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는 주인공들이 겪어나가는 악몽과 같은 황폐한 현실과 내면의 풍경을 그로테스크하게 형상화한 소설들은 눈물이 되어 나오지 않는 답답한 슬픔을 느끼게 한다. 잔혹한 삶, 그보다 잔혹한 소설 김숨의 소설은 잔혹하다. 가능성 자체가 봉인되어 있는 세계에서 그가 조형해내는 소설적 공간은 잔혹성 그 자체를 강조하는 고통스러운 이미지로 조형된다. 마치 잔혹해지는 것만이 지독한 삶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듯. 악취와 어둠이 가득 찬 공간들은 우리의 삶이 은폐하고 있는 심연을 아프고 깊게 각인하는 미학적 기획으로 다가온다. 이 잔혹하고 그로테스크한 상황과 이미지는 독자의 이성보다 먼저 신경과 심장을 각성시킨다. 강유정(문학평론가) 간질발작을 앓고 있는 스물아홉 살 ‘나’의 아버지는 개를 잡아 보신탕집에 납품하는 ‘업자’이다. 한때 금산 바닥에서 ‘주먹’으로 통했던 ‘아빠’를 보면 개들은 꼬리를 다리 사이에 감아넣고 바닥을 설설 긴다. 그런 개들을 아빠는 가차없이 끌고 가 감나무에 매단다. “목이 졸리고 온몸이 까맣게 그슬린 채” 죽은 개를 손질하기 전 아빠는 개의 피를 양껏 마신다. 처참하게 죽어나가는 개들을 볼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한기가 몰려들며 손가락들이 끝에서부터 딱딱하게 굳”고 “의식이 포말처럼 하얗게 끓어오”르다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진다.(「투견」) 김숨의 묘사는 잔혹하고 처참하고 냉정하다. 육식과 폭력을 일삼다 급기야 그것에 무감해진 아버지에 대한 이러한 잔혹한 묘사는 잔혹한 현실에 대한 제유이다. 실질적인 상징계적 법칙인 아버지가 폭력과 흡혈을 일삼는 곳, 그것은 김숨이 인식하고 있는 현실의 모습에 다름아니다. 아버지는 허리를 다쳐 일을 할 수 없고, 엄마는 이 년 전 집을 떠나버렸으며 두 쌍둥이 동생들은 고아원에 맡겨졌다. 아직 말도 못 하는 동생의 허리춤에 끈을 묶어 문고리에 걸어두고 학교에 가야 하는 소녀. 현실은 거미줄처럼 치밀하게 얽혀 빠져나갈 수 없는 미궁과도 같다. 어느 날 밤, 악몽처럼 이웃 남자에게 강간을 당한 소녀는 죽음을 택하고 만다.(「유리눈물을 흘리는 소녀」) 김숨이 직조해낸 세계는 현실의 모습에 잠식당한 거울이다. 더이상 꿈꿀 수조차 없을 때, 그 꿈이 악몽으로 변할 때, 잔혹한 세상의 풍경은 지옥의 스케치가 된다. 김숨이 보여주는 세계는 현실에 대한 전복이라기보다 현실의 잔혹함에 대한 우회적 모사이다. 개선의 여지가 봉쇄된 잔혹한 현실의 재확인은 현실의 논리에 내재해 있는 결핍을 은폐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출구 없이 봉인된 추상적 세계는 현실의 잔혹함에 대한 탁월한 성찰이자 비유로 다가오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을 벗어날 수 있을 가능성까지 휘발시킨다는 점에서 절망적 허무주의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새잎이 돋아날 봄을 기다린다”는 구절이 없어도―소설의 운명 조그만 방에 틀어박혀 조용히 책을 읽는 오빠. 그 오빠가 어느 날 자기 방 천장에 조그만 구멍을 뚫는다. 밤하늘이 그대로 보이는 낭만적인 구멍을. 하지만 그 구멍으로 비가 들이칠 때는 고스란히 젖을 수밖에 없다. 이를 용납할 수 없는 아버지는 지붕으로 올라가 구멍을 막아버리고, 오빠는 집을 나간다. 오빠가 집을 나간 이후 교통사고를 당해 빠른 것을 무서워하게 된 어머니는 자신의 느린 속도를 위반하기 시작한다. ‘나’는 겨울나무에 대한 시를 썼다가 “새잎이 돋을 봄을 기다리겠다”는 구절이 없어 시화전에 전시되지 못한다.(「느림에 대하여」) ‘느림에 대하여’라는 제목은 빠름이라는 근대사회의 절대적 윤리를 역행하는 존재인 ‘작가’ ‘소설가’의 운명에 대한 제유이다. 21세기에 소설을 쓰고, 문학을 하며 살아가는 것은 명백히 세상의 속도에 위배되는 역류이다. 느린 걸음을 걸으며 어둑한 방에서 구멍 밖 하늘을 바라보는 오빠는 후기 산업화 시대의 작가가 처한 고단한 현실을 보여준다. 지붕에 뚫린 구멍을 통해 낭만을 누릴 수 있지만, 그 구멍은 세상의 시련을 막아주지는 못한다. 낭만성을 허용하지 않는 세상에서 문학적 열망은 너무나도 무방비하게 노출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잎이 돋을 봄을 기다리겠다”는 목소리가 없어 시화전 작품 공모에 떨어진다 해도 겨울나무를 노래한 시를 쓰겠다는 화자의 고백은 소설가 김숨의 문학적 선언으로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또한 소설가의 운명이자 이 시대 문학의 운명이기도 할 것이다.

떠도는 땅

<떠도는 땅> 읽는 이의 마음에 자국을 남기는 작가 김숨. 그의 집요함과 세심함이 만들어낸 이야기의 힘과 서사의 밀도는 독자와 평론가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많은 에너지와 감정 소모를 필요로 하는 작품을 써내며 쉼표 하나, 말줄임표 하나에도 온 마음을 쏟는 그다. 그렇게 온 힘을 다해 써내려간 문학의 자리엔 숭고함이 남는다. 일본군 위안부, 입양아, 철거민 등 소외된 약자와 뿌리 들린 사람들을 보듬어왔던 그가 이번 작품에선 '디아스포라'를 노래한다. 집필 기간 4년, 소설가 김숨이 1년 9개월 만에 장편 <떠도는 땅>을 내보인다.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이상문학상 등 국내 주요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김숨. 2020년 올해로 등단 23주년을 맞은 김숨은 인간 존재의 근원과 존엄성에 대한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며 문단과 독자의 많은 호평을 받았다. 인간 존엄의 역사를 문학으로 복원해온 그가 한국문학장(場)에 뜨거운 숨을 불어넣고 있다는 점에 이견은 없을 것이다. 특히 이번 신작은 고려인의 150년 역사를 응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하다. <떠도는 땅>은 1937년 소련의 극동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고려인 17만 명이 화물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다. 화물칸이라는 열악한 공간을 배경으로 열차에 실린 사람들의 목소리, 특히 여성의 목소리를 빌려 디아스포라적 운명을 이야기로 확장시킨 이 소설은 슬픔과 그리움이 고인 시간을 걸어온 고려인들의 비극적 삶, 그리고 오랜 시간 '뿌리내림'을 갈망했던 그들의 역사를 핍진하고 섬세하게 그려낸다. 구상부터 탈고까지 총 4년이 걸린 작품으로 격월간 문학잡지 「Axt」에 연재했던 소설을 2년 6개월 동안 개고하였다.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 73권. 김숨의 연극은 ‘반복’되는 임종의 순간이자 거대한 장례식인 것이다. 반복은 습관을 만들어내고 습관은 두려움을 없앤다. 홀로 남겨짐에 대한 공포로 인해 쓰게 되었다(「작가의 말」)는 몇 편의 소설은 이렇게 반복을 통해 영원한 고립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휘발시킨다. 김숨의 반복강박은 미래완료형의 사건을 현재진행형으로 되풀이하면서 감정의 경계를 성취한다. 다른 작가들의 그로테스크한 묘사와 달리 김숨의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담담한 어조를 벗어나지 않는다. 대상을 심하게 왜곡하는 과장적인 표현법이 어떠한 심적 미동도 허락되지 않는 고요함과 나란하게 놓이는 세계, 이것이 김숨 소설의 불편한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