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능력을 각성했다. 말 그대로 아포칼립스 시대가 도래했다. 나는 눈을 감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 괴물들은 나를 위협하지 않고 그저 지나쳐 갔다. 하지만 반대로 내가 잠깐이라도 눈을 뜨거나 목소리를 낸다면, 나와 같은 '영역'에 있던 모든 괴물이 일제히 내게로 달려들었다. 그러다 웬 쌍둥이와 마주쳤다. 머리부터 발끝, 눈썹 위의 점 하나까지 똑같이 생긴 그들은 지나치게 사기적인 능력과 실력, 그리고… 사기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똑같은 얼굴이 둘이나 있으니까 눈 호강이 두 배네.’ 그런 두 사람을 차마 내칠 수 없어서. 별수 없이 우리 셋이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세 명이서 오손도손 살아남을 생각이었다. 분명 그랬을 텐데. “야, 김하영. 누가 우리 운동장 안으로 기어들어 와서 숨어 있던데?” “오빠! 자꾸 사람들이 그 재수 없는 쌍둥이가 한울고 대표인 줄 착각한다니까요! 답답해 죽겠어!” “대표님, K마트 측 생존자 집단에서 대표님을 뵈러 왔다는데요. 여기로 모셔올까요?” ...내게 들러붙는 것들이 좀 많아진 것 같다. *** 이성적인 사고를 거칠 틈도 없었다. 다짜고짜 손을 뻗은 차제오가 김하영의, 소년의 메마른 팔목을 감싸 쥐었다. 그러나 미련하게도 차마 이렇다 할 힘은 주지 못했다. “어, 어디… 어디 가?” 그리 묻는 차제오의 목소리가 줏대 없이 요동쳤다. 못지않게 일그러진 낯의 그가 제 아랫입술을 사납게 짓씹었다. 차제오의 짐승적인 감이 적신호를 켜고서 마구 사이렌을 울리고 있었다. 지금 눈앞의 소년을 놓칠 수 없다고,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고. 만일 놓치게 된다면, 이번이 소년과의 마지막 만남이 되어 버리고 말 거라고. 분명 간절하지 않았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간절해졌던 걸까. 실은 표현만 그럴듯하게 했을 뿐이지 쌍둥이는 간절함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다. 간절하게 원한다는 것도, 간절하게 바란다는 것도 쌍둥이의 삶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었으니까. “…가지 마.” 화려한 언변의 솜씨도, 솔직한 감정의 고백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배우지 못했기에 알지 못했다. 그래서 차제오는 그저 처절하고 애달프게 간청할 수밖에 없었다. “안, 가면 안 돼…?” 주제도 모르고 너의 세상을 비집고 들어가고팠던 욕심은 버릴 테니까, 그 세상을 옆에서 지켜만 볼 수 있게 해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