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왜.”자신이 좋아하는 여자를 멀리서 바라보며 지켜주는 남자, 베르 그래트.그러나 그 남자의 사랑은 보답 받지 못했다. 늘 여주인공인 세시아의 곁에 있고, 세시아에 관한 일이라면 제일 먼저 나서던 베르는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없었다. 그는 주인공을 위한, 주인공이 빛나게 할 순간에만 존재할 뿐이었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이뤄지지 않을 생각을 하며 베르를 위로하듯 문장을 쓸었다.마지막 기억을 끝으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소설 ‘공작의 연인’의 악녀 프리란스가 되어 있었다.인생이 조연같다고 생각하는 여자와 인생이 조연인 남자의 이야기.
아무도 없는 조용한 신전. 오직 한 커플과 한 명의 신관만이 그곳에 있었다. “두 사람은 이로써 제국이 인정하는 합법적인 부부가 되었습니다.” 신관조차 형식적인 목소리였다. 잘 살라는 말도 없었다. 그 자리에는 축하하는 이도, 그들 사이에 뜨거운 애정의 입맞춤도, 눈 맞춤도, 반지 교환식도 없었다. 그렇게 베르샤의 연인이었던 라온과 베르샤의 친구인 키나는 부부가 되었다. * “……일찍 오셨네요.” “왜 먼저 갔습니까?” 키나가 라온을 바라보니, 그는 목소리만큼이나 화난 듯 보였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는 그녀가 드레스를 만지작거렸다. “옷은 왜 혼자 고른 겁니까?” 공작 부인의 품위에 맞는 옷을 고르지 못할까 봐 걱정한 건가 싶은 생각까지 드는 질문이었다. 수수한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던 그를 떠올리며 키나는 아주 틀린 말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맘에 안 드시면 디자이너를 불러서 바꿀게요.” 키나가 문 앞에 서 있는 라온을 지나쳐 디자이너를 부르려고 손잡이를 잡았을 때였다. “내가 안 올 줄 알았습니까?” 문고리를 돌리려던 키나의 손이 멈췄다. 그를 돌아보지 못하는 건, 마주 보면 자신의 마음을 들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며칠간의 다정함으로 처지를 잊은 그녀의 옹졸함이.
“이혼……해요.”일라이가 셔츠를 풀던 손을 멈추고 루비를 바라보았다. 드물게 놀란 표정이었다.그건 루비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가 충동적으로 뱉어놓고도 놀랐다.그러면서도 그가 이유를 물으면 무슨 대답을 할까,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2주 뒤.”“……네?”일라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 평이한 목소리로 셔츠 단추를 풀었다.“수도에 갈 일이 있으니 그때 해. 황제께는 미리 말씀드려 놓지.”“…….”“이혼할 때 원하는 건 따로 적어서 줘.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찰나에 스친 그의 표정이 신기루처럼 느껴질 만큼 깔끔한 대답이었다.오히려 말문이 막힌 건 루비였다.자신에게 질문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니. 참으로 어리석었다.“그래요.”루비가 쓸쓸하게 웃으며 방을 나왔다.그와 이혼한 날, 루비는 마차 사고로 죽었다.*깨어나 보니 결혼 1년 차.이번에도 당연히 쉽게 이혼할 줄 알았는데…….“이혼하자고 편지 보냈어요.”“뭐?”“당신이 폐하께 말씀드리면 금방 끝날 일이니까……”“안 돼.”“……네?”“루비. 나는 이혼할 생각이 없어.”들어본 적 없는 다정한 목소리와 얼굴로 말했다.남편과의 두 번째 이혼이 쉽지 않을 것 같았다.#회귀 #능력남 #다정남 #후회남 #독점욕/질투 #평범녀 #다정녀 #짝사랑녀 #상처녀
[해당 작품은 2부로, 1부 ‘키나의 연인[개정판]’과 이어집니다. 구매 전 참고 바랍니다.] “제가 한예은 씨 보호자입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날 장례식장에서 그를 만났다. 부모님의 부탁으로 예은의 보호자가 되었다는 그를. “예은 씨네 부모님 교통사고를 조사했어요.” 부모님의 의문스러운 사건을 조사해 주고, “내 조건은 알다시피 예은 씨가 이 집에 머무는 거예요. 범인이 잡히고 안전해질 때까지.” 예은의 안전을 걱정해 주며, “복수해 줄까요? 예은 씨가 원하는 대로 해 줄 수 있어요.” 모두에게 손가락질만 받던 예은을 편견 없이 바라봐 주는 한결같이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예은이 빠져드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왕 좋아할 거면 더 멋지고 괜찮은 사람을 좋아해요.” 괜찮은… 다른 사람. “레오나르도 씨가 보기에도 멋지고 괜찮은 사람이면….” 예은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물었다. “응원…해 주시는 거죠?” “응원만 해 줄까. 예은 씨한테 얼마나 진심인지, 얼마나 잘하는지 감시할 거예요. 그러니까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데리고 와요. 면접 봐 줄게요.” 비록 같은 마음은 아니더라도. 그런데 자신이 찾는 살인자의 물건을 왜 그가 갖고 있지? “언제부터 날 알았어요?” “….” “왜 내 옆에 있는 거예요?” “… 예은 씨.” “오지 마요.” “날 죽이려고 한다는 사람이… 설마 당신이에요?” 마지막 질문을 할 땐 오히려 목이 메었다. 그래, 불행을 타고난 내게 다정한 사람이 있을 리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