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보다 못한 취급에도 그의 앞에선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처음 마주쳤을 때 가슴에 와 박힌 건 윤의 눈빛이었다. 웅크린 흑색 범을 연상케 하는 오만한 시선과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예기(銳氣).한 치의 틈도 없는 그 눈 속엔피부를 찌를 듯한 싸늘함 외의 무언가가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술과 계집에 빠져 지낸다는 사내의 눈이 이럴 수 있을까.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채 팔려 가듯 하게 된 혼인이었지만소문과 다른 그의 모습에 가슴을 조여 오던 불안함이어느새 조금씩 수그러들어 가고 있었다.하지만 그 믿음은 두어 식경도 되지 않아 깨어지고 말았다.첫날 밤, 그것도 초야를 치르지도 않는 신방에다른 계집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는 새신랑이라니.머나먼 왕족의 딸로서 말조차 하지 못하는 벙어리 신부는그에게 있어 한낱 금수만도 못한 존재였던 것이다…….
<천일화> 시린 칼날 아래 핀 불멸의 꽃(愛) 대로국의 칼날에 소국 연이 피로 물든 운명의 밤, 대로국의 상장군 한율과 연의 마지막 왕녀 부용은 각자의 가슴 속에 차갑고도 뜨거운 불꽃을 품는다. 망국의 아픔을 달랠 새도 없이 원수의 노예가 되어 원망과 거부의 몸짓을 보이는 부용, 상처 입은 자존심과 흔들리는 마음을 숨긴 채 그녀를 모질게 대하는 한율. 부딪치는 두 마음은 하나가 되지 못하고 상처만을 주고받는데……. ▶ 잠깐 맛보기 "무엄하게…… 이 손 놓지 못할까?" "무엄이라? 정말 말귀를 못 알아듣는 모양이군. 이제 그대는 대로국의 노예일 뿐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는 연의 왕녀가 아니라는 말을 몇 번이나 상기시켜 주어야 정신을 차리실 건가요, 공주님?" 비수를 찌르는 한율의 조롱에 부용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내 처지는 내가 더 잘 아니 장군께서 걱정하실 일이 아닐 듯합니다." "호오, 그래? 아주 재미있군." 팔목에 닿은 그의 힘이 미약하게 느껴지자 부용이 재차 잡힌 손목을 빼내려 했다. 그가 일부러 방심하게 한 것을 알 턱이 없는 그녀는 사내의 가슴에 뺨이 닿자 노여움으로 온몸이 타올랐다. "이…… 무슨 무례한 짓이오?" "건방진 노예는 매로 다스리는 것이 최고지. 하나 귀하신 분께 매를 든다는 것은 사내대장부가 할 짓은 아니지. 아니 그렀습니까, 마마?" 부용의 팔목을 뒤로 돌린 그가 도톰하고 촉촉한 꽃잎을 예고도 없이 덮쳤다. 한율은 달디단 과즙을 들이키듯 부용의 입술을 물고 놓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