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인생 속 단 한줄기 빛인 그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보답은 고작…. “말썽 피우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나간다느니 또 허튼소리 하면 그땐 무사가 아닌 족쇄를 달 거니까.” “…이럴 거면 그냥 개를 키우시지 그러셨어요.” 이제 그만할 때가 되었다. 제 주인이 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여인도… 일방적인 사랑도. “저를 개처럼 여기시는 걸 모를 줄 아세요?” 이름조차 빼앗긴 여인의 눈에는 울분과 서러움이 가득 차 있었다. “전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에요. 그러니 이곳에서 나갈 거예요.” “하, 누가 그래도 된다고 했지?” “제가요. 저 스스로 결정했어요.” 태양을 받드는 카산의 아홉 손, 무트란의 정부는 오늘부로 사라질 것이다. 이것은 오만하고 이기적인 당신에게 보내는 나의 마지막 진심이었다.
다음 황위 계승자이자 모든 여인의 첫사랑인, 페르난데 대공. 여인에게 눈길조차 섣불리 던지지 않던 그가 긴 시간 유지한 독신 생활을 청산하려는 듯 전국에 초대장을 보낸다. 초대장의 내용은 간단했다. 「대공 부인을 찾는데, 어쩌면 당신이 그 주인공이 될지도 모르지.」 그러나 간단한 내용과는 달리 초대 목록에 올라간 이름들은 상당히 난해했다. 그리고 그중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를 뽑자면… 그건 바로 베가 남작가의 구박데기 ‘디아나 베가’였다. “전하께서 초대하신 분은 디아나 베가 양입니다.” “디아나…라니요? 우리 비비안느가 아니라?” 분명 실수가 있었을 테다. 대공이 초대하려는 여인은 디아나가 아닌 비비안느일 테다. 모두가 그리 믿고 싶었다. “어떻게 너 같은 가문의 수치가 대공 전하의 초대를 받을 수 있어!” 그런데 사람들은 알까? 대공 또한 본래 저 음침하고 기이한 여인을 사랑할 계획이 아니었다는 것을.
사랑하는 약혼자와 가장 아끼는 친우의 배신. “네 배 속에 있는 그 아이, 저하의 아이야?” “그, 그게… 르네트… 그게… 흐윽… 내가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라….” 가장 믿었던 두 사람은 날 기만한 것도 모자라, ‘역모’라는 가당치도 않은 명목을 붙여 내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 그렇게 타국의 노예가 되었고, ‘괴물의 신부’로 끌려가는 신세가 됐다. 이 혹독한 이 운명의 끝은 도대체 무엇일지 싶던 그때, 전혀 예상치 못한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는데. “카젠 타제트라. 네가 그렇게 인간이 되길 빌던 네 남편이지.” 그저 산 제물로 팔려 온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의 신랑이 될 ‘괴물’은… 알고 보니 그 위대한 ‘타제트라 제국’의 주인이 될 이였다.
고결하면서 타락한. 순결하지만 퇴폐적인. 다정한데 파멸적인. 북부의 주인인 에녹 틴헤임은 이율배반적인 수식어를 가진 남자였다. “그리웠어, 아그네스.” 무엇 하나 아쉬운 것 없는, 그 어느 순간에도 절실할 리 없는 남자가 애원했다. “앞으로 절대 떨어지지 말자.”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아그네스.” 자신은 ‘아그네스’가 아닌 ‘아네스’였다.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 한낱 교화 죄인에 불과한 자신을, 그는 첫사랑 ‘아그네스’로 여겼다. “제 이름은 ‘아네스’인데… 혹시 다른 사람하고 착각하신 건 아닐지 싶어요.” “아그네스.” “…….” “아그네스가 맞아. 하지만 원하면 아네스라고 부르고.” 그때 깨달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은 오직 ‘아그네스’뿐이었다. “네게 모욕적인 말을 한 새끼들이잖아. 다 죽여야지.” 이 정신 나간 남자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선 완벽한 ‘아그네스’가 되어야 했다.